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구나

껍질 속의 나, 껍질을 두른 나

by 파드마

[진짜 나를 찾아서]

당신이 생각하는 ‘진짜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요가에서 말하는 ‘진짜 나’는,
나를 타인에게 설명하기 위해 꺼내 드는 성격이나 생각, 감정 같은 것이 아니에요.

때때로 비바람에 흔들리고,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와도 끝내 사라지지 않고,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는 가장 밑바닥의 나.

그걸 요가에서는 아트만(Ātman, 변하지 않는 자아)이라고 해요.
하지만 그 아트만은 곧바로 느껴지지 않아요.
그 앞을 가리고 있는 다섯 겹의 껍질들,
코샤(Kośa) 때문이에요.

요가 철학에서는 우리 안에는 이 다섯 겹의 코샤가 존재하며, 이 껍질을 하나씩 감각하고 알아차리는 과정을 통해 진짜 나에게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코샤, 나를 둘러싼 다섯 겹의 껍질]


첫 번째 껍질.
아나마야 코샤(Annamaya Kośa) '몸'의 층이에요.

피부, 뼈, 근육처럼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나.
지치거나 아플 때 가장 먼저 반응하는 껍질이에요.
“오늘은 몸이 안 따라줘”라는 말은,
바로 이 껍질에서 오는 감각이에요.

두 번째 껍질.
프라나마야 코샤(Prāṇamaya Kośa) '숨'의 층이에요.
숨이 막히면 가슴이 조이고, 숨이 깊어지면 마음도 풀리잖아요.
단순한 호흡을 넘어서 몸 안을 흐르는 기운,

생명력 전체를 말해요.
‘오늘은 뭔가 힘이 없네’ 하고 느껴진다면,
그건 이 껍질이 보내는 신호일 수 있어요.

세 번째 껍질.
마노마야 코샤(Manomaya Kośa) '마음'의 층이에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괜찮았던 하루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별일 아닌 순간에도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온다면
그건 바로 이 껍질이 반응하고 있는 거예요.
감정, 생각, 반사적인 마음의 조각들이
이 껍질 안에 모여 있어요.

네 번째 껍질.
비냐나마야 코샤(Vijñānamaya Kośa) '판단'의 층이에요.
왜 내가 그렇게 반응했는지,

왜 그 말을 그토록 신경 썼는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나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껍질이에요.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나를 한 발짝 멀리서 바라보는 의식이죠.

다섯 번째 껍질.
아난다마야 코샤(Ānandamaya Kośa) ‘고요의 층’이에요.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고,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
모든 감정이 지나간 뒤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말 없는 기쁨.
요가에서는 이 껍질을
가장 안쪽에 남은 기쁨의 층이라 말해요.

그리고, 이 다섯 껍질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그 순간.
그제야 조금씩 마야(Māyā)
‘이게 나야’라고 믿게 만들었던 베일이 걷히기 시작해요.
그때부터 진짜 나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여정이 시작되는 거예요.




[겹겹이 겹쳐진 나를 만나며]

그런데 저는,
그 겹겹의 껍질들이 고르게 균형 잡힌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전에도 정말 많이 망설였어요.

‘나는 아트만에 가까워지고 있는 걸까?’
‘내가 감당해 온 감정들, 지금 이 말투가 진짜 나일까?’
‘나는 대체 어디까지가 나일까?’

여전히 저는 마야라는 베일 뒤,
수없이 겹쳐진 껍질들 안에서 존재하고 있어요.
다섯 겹이라는 숫자가
너무 작게 느껴질 정도로요.

하루에도 몇 번씩,
수백 개는 넘는 듯한 표정의 가면을 쓰고,
그 위에는 생각의 층을 덧입히며 살고 있어요.

예를 들면,
집에서는 괜히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다가도
요가 수업만 들어가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

회원들에게는
"욕심 내려놓고 천천히 하세요."
"그거 못 해도 괜찮아요."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제 수련 시간에는
한 동작이라도 더 해 보겠다는 조급한 마음에,
자꾸만 호흡이 빨라지는 나.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한 겹을 벗기면 그 아래 또 다른 껍질이 있고,
그 밑에는 또 다른 감정이 숨어 있다는 걸 느껴요.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게 되죠.

“아, 나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그 모습이 낯설기도,
익숙하기도 하면서
어딘가 서늘하게 다가올 때도 있어요.

하지만 결국엔 알아차려요.
그건 처음 보는 내가 아니라,
예전부터 있었던 나였어요.
다만, 한 번도 말을 걸어보지 않았을 뿐이죠.




[내가 이 글을 써도 되는 걸까]

이 글을 읽어보던 지인이 이런 말을 했어요.

"이 글 속의 너는 네가 아닌 것 같아."
"글 속의 너는 이렇게 다정하고 사유 깊은데, 내 옆의 너는 왜 이래?"

처음엔 좀 억울했어요.
"이게 나기도 한데, 왜 나 같지 않다고 말하지?"

내가 써낸 말들이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는 그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글 속의 나는
내가 미처 꺼내지 못했던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던 것 같아요.

느리고도 조용하게, 하지만 아주 꾸준히
내 안에서 차곡차곡 쌓여오고 있었던
생각의 조각들과 마음의 단면들.

그걸 저는 이 글 속에 처음으로
꺼내 보이고 있었던 거예요.

이제껏 말로 꺼내진 적은 없지만
분명히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던 결.
잊고 있었을 뿐, 사라진 적은 없는 결이요.




[코샤, 그 경계를 따라 안으로]

하루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명상 중이었어요.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내면의 시선을 열었죠.

가장 먼저 목선을 따라 내려갔어요.
어깨뼈의 너비를 감각하고,
쇄골의 선을 그려보았어요.

숨이 들어오는 순간,
늑골이 살짝 오르내리는 걸 느껴봤어요.

양쪽 골반의 기울기를 살펴보고,
오른쪽과 왼쪽 엉덩이가 바닥에 닿는 감각이
얼마나 다른 지도 살펴봤어요.

그 아래로는,
다리의 길이와 무게 중심이 어디에 쏠려있는지.
무릎은 같은 각도로 접혀 있는지.
발끝은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지.

내 몸의 선을 따라가며,
보이지 않는 구조를
안쪽에서 하나하나 그려보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순간—

그 선이 더 이상 내 몸의 ‘안과 밖’을
나누지 않게 되었어요.

‘이건 내 팔’
‘여기까지가 나’

그런 구분의 경계가 아주 천천히,

자연스럽게 풀려나갔죠.




[다시 경계 위에서]

하지만 그런 감각은, 오래 머물지 않았어요.

눈을 뜨자 다시 현실이었고, 평소처럼 말했고,
예전처럼 움츠러들었어요.

몸의 선이 경계가 아니었던 그 순간은
마치 꿈처럼 흐릿해졌죠.

깨달음은 언제나 짧았고,
그 감각 위로 다시 신체와 바깥의 경계가 얇게 그려졌어요.
아쉬운 마음이 스치긴 했지만, 허무하진 않았어요.
그 감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마음 어딘가에 잔물결처럼 남아 있었거든요.
마치 벌거벗은 마음 위에
얇은 천이 살짝 덮이는 것처럼
아직은 드러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했어요.

그때 문득,
껍질은 반드시 통합하거나
벗겨내야만 하는 대상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저 지금 느껴지는 감각 하나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그 겹겹의 층이 저마다의 결로 다가오고,
그 자체로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으니까요.

어떤 날엔
그 껍질 덕분에 숨 돌릴 틈을 얻기도 하고,
말로 꺼내기엔 아직 거친 마음을 가만히 덮어두기도 해요.

예전엔 조화롭지 못한 나를 자꾸 다듬으려 애썼지만,
지금은 겹겹이 겹쳐진 그 모습 그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요가를 하며,
껍질을 하나씩 더듬고 내면을 들여다보지만,
때때로는 진짜 양파를 들고,
옆 사람에게 버럭 화를 내며 예민하게 굴기도 해요.

두 모습이 모순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순간순간 올라오는 감정을 ‘지금’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완성된 존재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벗겨내는 대신 조심스럽게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한 겹 아래의 나를 어렴풋이 느껴볼 수 있다면,
나는 오늘도,
다시 내 안의 결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중이니까요.




다음 편 – 다시 마시는 숨 (최종편)

처음엔 그저 운동이었어요.

옆자리 도반 언니가
어려운 요가 철학 책을 열심히 읽는 걸
그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 마음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한 번,
써보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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