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괜찮은 하루였다
가끔 그런 생각도 했어요.
나… 성인 ADHD 아니야?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게 이상하리만큼 어려웠거든요.
가만히 있으면 뭔가를 놓치는 것 같고,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요가원에 “그냥 쉬러 온다”는 도반의 말이 한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런 저에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이 드디어 찾아왔어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요가를 지도하게 되면서,
그 고요함 앞에서 힘겨워하는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명상 시간마다 미간을 찡그리거나, 실눈을 뜨고,
머리를 긁는 수련자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던 건,
저 역시 그 자리를 지나왔기 때문이겠죠.
어쩌면 이 시대의 요가는,
그런 우리를 품기 위해 수련의 방식 자체를 조금씩 바꿔온 게 아닐까 싶어요.
정적인 고요 속에 오래 머무르기보다,
몸을 움직이며 몰입을 돕는 흐름으로
수련의 방법이 자연스럽게 변화해 온 거죠.
우리가 ‘움직임’이라 부르며 수련해 온 그 자세들은
사실, 정적인 명상을 위한 준비였어요.
그리고 명상은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깊고, 가장 어려운
요가 수련의 근원이었던 거예요.
정적인 수련이 어려운 이유는,
그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으면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움직이지 않으면,
조용히 숨만 쉬고 있어도 머릿속이 자꾸 바빠지고,
내 안의 부족함이 더 크게 느껴지곤 하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그냥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보다는,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에 더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아요.
<있는 그대로의 몸을 받아들이는 법>
요가 1년 차면 머리서기(시르사아사나) 정도는 해야 하고, 2년 차쯤 되면 다리 찢기(하누만아사나)는 가능해야 수련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분들도 많았어요.
사실 저도 그랬어요.
그래야 어디 가서 “요가 수련하고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죠.
그런 기준 속에서,
많은 분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불평하곤 해요.
“저는 다리가 짧아서요.”
“허리가 길어서 밸런스가 안 잡혀요.”
“팔이 안 닿아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예전의 제 모습이 떠오르곤 해요.
“저는 엄지발가락이 짧고 통통해서 잘 안 잡혀요.”
“척추측만이 있어서 좌우 밸런스가 잘 안 맞아요.”
하지만 그건 단점이 아니라, 그저 나의 구조였어요.
완벽한 체형은 없거든요.
다리가 짧으면 중심이 잘 잡히고, 팔이 길면 안정성에 이점이 있죠.
결국 아사나는 그 사람의 몸에 맞게 변형되는 거고,
중요한 건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였어요.
‘아, 내 몸엔 이런 특성이 있었구나.’
그대로 인정하고, 그 자리에 머무는 태도.
저는 어깨와 흉추가 부드러운 편이에요.
그래서 가슴을 여는 자세는 익숙했지만,
역자세는 여전히 어렵고 좀 불안해요.
예전엔 그런 모습이 불만스러웠는데,
지금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해요.
어떤 동작은 잘 되고, 어떤 동작은 여전히 안 되는 몸.
그걸 억지로 바꾸려 들기보다, 그대로 두기로 했어요.
잘하는 것도, 잘 안 되는 것도
지금의 나니까요.
<산토샤>
산토샤(Santosha).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와 상황을 받아들이며 평화롭게 머무는 태도를 의미하는 말이에요.
크게 성취한 것도 아닌데 마음이 차분해지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냥 두어도 괜찮게 느껴지는 상태.
무언가를 이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을 성실히 지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애썼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마음.
“이 정도밖에 못했어. 나는 왜 이럴까?”가 아니라
“이걸 경험하고 있는 나, 생각보다 꽤 괜찮고 멋있잖아.”라고 말할 수 있는 태도.
그래서 산토샤는
하루를 그저 무사히 지나왔을 뿐인데도,
가슴 어딘가가 아주 천천히 따뜻해지는 감각이에요.
오늘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했고,
생각보다 일이 더 꼬여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깊은숨을 내쉬며,
그런 하루도 “이런 날도 있을 수 있지”라고 말할 수 있는 조금 너그러운 이해.
<오늘 하루도 이만하면 괜찮아>
정신없이 바빴던 날의 끝.
가방을 내려놓고 찬물 한 컵을 마신 뒤,
소파에 몸을 기대요.
입안에 스치는 차가움, 등 뒤 쿠션의 부드러운 저항.
그렇게 잠시 숨을 고르고 나면, 이렇게 말해보는 거예요.
“그래, 오늘도 여기까지 잘 왔어.”
“조금 지치긴 했지만, 잘 버텼어.”
또 어떤 날엔,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몸은 무겁고 마음도 따라 처지죠.
해야 할 일은 그대로인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고
정리되지 않은 방 안의 풍경이 내 마음까지 뒤엉켜 놓을 때.
그럴 땐, 억지로 나를 밀어붙이기보다
이렇게 말해보는 건 어때요.
“오늘은 좀 쉬자.”
“지금은, 그럴 수도 있는 날이야.”
그런 날엔, 그냥 그렇게 한 번 말해보는 거예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쉬어보면, 그게 꼭 게으름은 아니란 걸 알게 돼요.
그렇게 결과보다 과정을,
완벽보다 진심을 바라보는 일.
산토샤는—
그 모든 판단을 잠시 멈추고, 나를 그냥 두는 일에서 시작돼요.
누군가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도, 누군가보다 나았기 때문도 아니에요.
그저 하루를 끝까지 통과해 낸 그 존재 자체로 충분해서.
어제보다 나은 내가 아니더라도,
오늘의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그 마음 하나면—
충분히 고마워도 되는 하루예요.
다음 편 –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구나
“글 속의 너는 다정하고 사유 깊은데,
현실의 너는 왜 그렇게 퉁명해?”
그 말을 들었을 때, 조금 억울했어요.
이 글도, 이 말투도 분명 내 안에 있는 나인데...
그럼 진짜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다음 이야기는,
그 질문을 따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들과 마주하게 된 순간의 기록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