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마시는 숨

철학이 아닌 삶에서 다시 만난 요가 철학

by 파드마

20대 시절, 저는 학원 강사였어요.
밤늦게 끝나는 수업과 불규칙한 식사.
학생들과 나누는 간식, 그리고 매일 같이 먹게 된 야식들.
그 생활은 결국 제 몸을 인생 최고의 몸무게로 이끌어버렸죠.

그래서 달리기를 시작했어요.
살을 확실하게 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거든요.
운동화 끈을 묶고, 귀엔 이어폰을 꽂고, 해가 지는 운동장을 달리면서
‘이건 나를 바꾸고 있는 시간’이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족저근막염이래요.
운동을 하겠다고 시작했는데, 그 몸이 나를 막아버린 거예요.

또다시 검색창에 찾아봤어요.
“족저근막염에 좋은 운동은 뭘까?”
그때 화면 속에는
“발바닥에 체중 부담을 줄이면서, 종아리와 햄스트링을 부드럽게 늘려주는 요가가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었어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그저 몸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
땀 흘리고 스트레칭하며 유연성까지 챙길 수 있는 운동으로서의 요가.
일석이조라는 말이 딱이었죠.

옆자리 도반 언니는 요가 철학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는데,
그걸 왜 읽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자꾸 쓰러지는 동작에서 생각이 멈췄고
숨이 끊겼고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어요.

그 감정이 뭔지 몰랐어요.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자꾸 생각이, 말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자꾸 문장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그때부터였어요.
요가가 운동이 아니라,
몸에서 시작된 언어처럼 느껴졌던 건.

요가 지도자 과정을 통해 요가 철학을 배우며 알게 됐어요.
그때 내가 만난 감정들이
“프라나”, “그란티”, “수슘나”, “무드라” 같은 말들과
조용히 이어져 있었다는 걸요.

그때의 숨 막힘은 아파나 바유의 정체감이었고,
그때의 몰입은 산토샤로 가는 통로였고,
그때의 손끝은 감정의 입구였다는 걸요.

몸이 먼저 알고 있었던 감각들이 나중에야 말이 되었어요.
그리고 그 말들이 글이 되었어요.

수련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아도
그건 이미 내 삶에 스며 있었어요.
숨을 쉬고, 손을 얹고,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들.
그게 요가였는지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 글은
요가의 개념을 해설하려는 글이 아니에요.

숨이 끊기던 순간,
어느 동작 위에서 울컥했던 감정,
그게 뭔지 몰라서
말로 붙잡아두고 싶었던 날들의 기록이에요.

차크라나 프라나야마, 쿤달리니 같은 단어들도
몸에서부터 일어난 감각이 먼저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쓰였어요.

요가는 자세를 잘 잡는 기술이 아니라
흐름을 다시 느끼고, 감정을 살펴보며
자기 자신을 품어주는 태도였어요.

그건 결국, 나를 이해하고 수용해 가는 과정이었어요.

그리고 이것은
요가 매트 위에서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요가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 글이 조용히 닿는다면—

그 감각이
삶을 조금 더 다정하게 바라보는
작은 연습이 되어줄 거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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