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는 게 제일 힘들어!
<그냥 쉬러 오는 요가>
같이 수련을 하던 도반들과 왜 요가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중 한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나는 그냥 쉬러 요가원 오는 거야.”
그때 저는, 고난도 아사나 도장 깨기에 푹 빠져 있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이 자리에 오는 것만으로도 제법 수고가 드는데,
그저 쉬러 요가원까지 온다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어요.
‘그럴 거면 집에서 쉬면 되지 않나? 굳이 요가원까지?’
그땐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 시절의 저는 요가를 언제나 ‘움직이는 것’이라 믿었어요.
못하는 동작에 도전하고, 그걸 성취해야만 그 시간이 유익하게 느껴졌죠.
버티고, 힘을 쓰고, 숨이 차고, 땀이 날 때.
내 몸이 한계에 닿아야 비로소 몰입할 수 있었고,
그제야 내면의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고 여겼어요.
그래서 수련 시간에 포함된 ‘명상’이나 ‘사바사나’ 같은 고요한 시간은 견디기 어려웠고,
때로는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기도 했었어요.
수업이 보통 1시간인데, 그중 10분을 가만히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데에 쓴다는 건, 그만큼 ‘시간이 날아간다’라고 느껴졌거든요.
그 시간에 빨리 워밍업을 시작해서, 어려운 아사나를 하나라도 더 해보고 싶었어요.
<이거 시간낭비 아니야?>
그렇게 느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도 있었어요.
명상을 하려 앉아 있으면 금세 허리가 아파왔어요.
눈을 감으면 눈썹이 씰룩이는 감각이 유난히 또렷하게 느껴졌고, 그 작은 움직임이 미간을 간질이기까지 했어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는 순간부터는 오히려
‘이 생각은 어디서 온 걸까?’하며 생각의 꼬리를 좇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오늘은 어떤 수련을 하게 될까?’, ‘피크 포즈는 뭘까?’하는 기대감에 제 머릿속은 금세 수련 쪽으로 달궈지기 일쑤였어요.
그러다 다른 분들은 정말 명상에 몰입하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몰래 실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다가 하필이면 그런 순간,
선생님과 눈이 마주쳐 민망한 미소를 지은 적도 여러 번 있었죠.
사바사나 시간엔 천장의 불빛과 플라잉요가 해먹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어요.
‘저 불, 깜빡이는 거 보니까 전구 갈 때가 된 것 같네.’
‘해먹 색깔이 은근히 예쁘네. 어디서 사는 거지?’
이런 생각들이 줄줄이 떠오르던 그때.
“연화 회원님, 하늘에 별이라도 보이세요?”
선생님의 한마디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어요.
솔직히,
스스로 집중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살짝 의심이 들기도 했죠.
그래서 저는 점점 더 ‘움직이는 요가’에 매달리게 됐어요.
움직이면, 몸이 말을 걸어왔고
몰입하다 보면, 머릿속은 조용해졌으니까요.
<석가모니와 깨달음>
요가 TTC 수업 중,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오래된 불상의 좌정(坐定). 그 고요히 앉아 있는 모습도 하나의 아사나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꽤나 큰 충격을 받았어요.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요가’라니요.
제가 아는 아사나는 언제나 ‘움직임’이었거든요.
알고 보니, 아사나(asana)라는 말 자체가
고대 요가 경전에서는 ‘앉는 자세’,
즉 명상을 위한 좌법에서 출발한 거였어요.
요가 철학에서 직접 불상을 언급하진 않지만,
우리가 명상의 상징처럼 떠올리는 모습은 대부분 그와 닮아 있어요.
팔은 무릎 위에, 눈은 감기거나 아주 살짝 떠 있는 상태.
그저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인데도,
마치 그 자리에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느껴져요.
문득, 보리수 아래 앉아 있었다던 석가모니의 모습도 떠올랐어요.
그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들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대로 머물렀다’는 사실이 저에겐 더 크게 다가왔어요.
그건 단순히 ‘고요한 자세’가 아니었어요.
움직이지 않아도 무언가가 계속 흐르는 상태.
말은 없지만, 마음은 흔들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 천천히 이어지는 깊은 집중의 시간.
숨도 미동도 없는 그 고요 속에서,
단단한 의지가 자리를 잡고 깨달음 하나가
천천히, 아주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가는 듯해요.
바로 그 감각이—
정적인 수련이 품고 있는 깊이. 고요 속에 깃든 깊음.
몸은 멈춰 있지만,
그 안에서는 분명히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 깊이를, 그때의 저는 좀처럼 따라갈 수 없었어요.
명상 시간엔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했고,
사바사나 시간엔 머릿속이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있었으니까요.
고요해야 할 그 시간에도,
저는 자꾸 무언가를 찾고 쫓아다니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고요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왔어요.
요가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거실에 매트를 펴긴 했지만,
사실은 너무 피곤해서 ‘사바사나’를 오래 하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누워 있는데,
맑은 공기가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내 코와 입을 통해 몸 안을 드나드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왔어요.
그러자 몸도, 마음도, 머릿속도 하나씩 잠잠해졌어요.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몰입할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 순간이었어요.
그리고 그 순간—
‘아, 그냥 이대로도 괜찮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어요.
그날 이후,
조용히 머무는 시간에 대한 저의 태도가
조금쯤은 바뀌었던 것 같아요.
다음 편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 [2]
요가 1년 차에는 머리서기를,
2년 차에는 다리 찢기를 목표로 삼고,
20대에는 대기업에 들어가야 하고,
30대에는 결혼해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그럴듯한 인생의 스크립트들.
가만히 있으면 게을러진 것 같고,
무언가를 해내야만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마음.
그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산토샤’라는 단어 아래,
그냥 그 자리에 머무는 연습을
당신도 함께 해볼 수 있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