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슘나를 상상하며, F와 T사이를 걷다

기울어진 몸과 나디의 이야기

by 파드마

[나만 아는 기울어짐]

초등학생 때까진 괜찮았어요.

가방 끈이 자꾸 한쪽으로만 흘러내리는 것,

오래 서 있으면 허리가 아픈 것쯤은 그냥 나만 아는 작은 불편함일 뿐이었거든요.

그러다 중학생이 되었고, (한국 교육환경 특성상) 긴 시간 책상에 앉아 있게 되면서 허리 통증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고, 병원에서 처음으로 ‘척추측만’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그래도 괜찮았어요.
그건 나만 아는 통증이었고, 내 안에 조용히 묻어둔 비밀 같았거든요.

그런데 그 비밀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건, 요가를 시작하면서부터였어요.

몸을 섬세하게 사용해야 하는 요가 수련은, 학창 시절보다 훨씬 더 척추의 뒤틀림을 뚜렷하게 느끼게 해 주었고 묻어두었던,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되었던 그 비밀을 드디어 마주해야 할 순간이 온 거죠.

예를 들면 이런 순간들이었어요.

하누만아사나를 할 땐, 오른 다리를 뒤로 보낼 때 훨씬 편했어요. 오른쪽 고관절은 유연했지만, 그만큼 힘은 약했고요. 반면, 다리의 힘은 왼쪽이 더 강했죠.

어깨도 마찬가지였어요. 오른쪽은 부드럽게 회전되는데, 왼쪽은 뻣뻣하고 둔탁하게 걸렸어요.

오른 다리를 뒤로 보낸 하누만아사나와 오른 어깨의 회전이 저에게 자연스럽고 익숙한 방향이에요

에카파다라자카포타, 간다베룬다 같은 깊은 후굴을 할 때면, 몸의 무게가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졌어요.



[감추던 마음, 드러나는 몸]

하지만 그건 나만 아는 감각.
우연히 찍힌 사진 속, 남들은 스쳐지나 보는 내 모습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섬세하신 요가 선생님들은 그 비밀을 여지없이 끄집어내서 저에게 또 한 번 말로 상기시켜 주세요.

“척추측만이 있으시네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 그 감각을 자각하고 중심으로 돌아오는 연습이 필요해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괜히 부끄러워졌어요.

몸의 기울어짐이 들킨 일은, 내 약점이 드러난 것 같았고, 마음속의 비대칭까지 발각되는 기분이었거든요.

‘저도 알고 있어요, 선생님…!’

속으로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겉으론 웃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후굴을 하다니! 이만큼 어려운 동작을 하다니! 저 대단하지 않나요?”


그렇게 그저 웃으며, 얼굴에 가면을 쓰고 스스로를 방어하기에 급급했어요.

왜냐하면 척추측만은, 제가 당장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모른 척했어요.

표정과 말투로 괜찮은 척하면서, 내 안의 비틀림을 살짝 덮어버렸어요.


느끼지만,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전형적인 자기 방어기제였던 것 같아요.
인지적으로 회피하고, 유머로 덮고,

'괜찮은 척'하는 말투로 나를 감췄던 거죠.

누군가 내 기울어짐을 지적했을 때,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스스로의 중심을 찾기보다,

그렇게 반사적으로 나의 비틀린 감정을 그리고 몸을, 그저 감싸고 숨기는 데 익숙해져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러다 보니, 중심을 잃은 채로도, 중심에 있는 척 살아가는 법만 늘었는지도 모르죠.



[몸이 말해주는 균형의 감각]

그러다 1년 전, 역자세에서 버틸 수 있는 상체 힘을 기르기 위해 폴댄스를 병행하면서부터였어요.

폴댄스는 오른 오금을 사용하는 동작이 많았고,

어느새 오른쪽 다리의 힘이 왼쪽보다 더 강해졌어요.
예전엔 왼다리로 버티는 게 익숙했는데, 이젠 오른 다리로 중심을 잡는 게 더 자연스러워졌죠.

그런 변화를 통해 조금씩 알게 되었어요.

균형이란 ‘양쪽을 정확히 나누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몸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살짝 들여다보려는 ‘의식의 전환’ 일뿐이라는 걸요.

그리고 그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삐뚤어진 몸 안에 중심선을 그려보려는 상상을 시작하고 있었어요.

그건 완벽한 중심을 찾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흐트러진 자리에서도 다시 중심을 떠올려보려는 작은 마음이었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아요.


선생님이 하셨던 그 말—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 그 감각을 자각하고 중심으로 돌아오는 연습이 필요해요.”
그건 ‘정확히 중심을 맞추라’는 뜻이 아니었어요.


흐트러진 자리에서도 다시 중심을 ‘느끼고, 그려보려는 감각’을 잃지 않길 바랐던 말이었다는 걸요.


그렇게 생각하니, 완벽히 곧지 않더라도 중심은 ‘상상’할 수 있었고, 그 상상만으로도 나는 내 안의 흐름을 조금씩 되돌리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수슘나, 흐름 속의 중심]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약간 기울어져 있어요.

척추는 여전히 완전히 곧진 않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 아주 미세한 선 하나가 떠올라요. 완벽하진 않지만 ‘중심’이라 믿고 싶은 선.
상상 속에서 흐르고 있는 수슘나.

그건 병원에서 교정해 주는 곧은 척추가 아니라, 매 순간의 감각 속에서 내가 되찾으려 애쓰는 중심의 이미지였어요.

요가에서는 나디라는 수천 개의 에너지 통로가 몸 안을 흐른다고 해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있어요.

• 왼쪽을 흐르는 이다 나디

수용적인 달의 에너지, 감정과 직관의 흐름


• 오른쪽을 흐르는 핑갈라 나디

활동적인 태양의 에너지, 논리와 실행의 흐름


• 그리고 그 사이, 수슘나 나디

척추 중앙을 흐른다고 전해지는 가장 미묘한 에너지의 선

이다와 핑갈라는 숨처럼 교차하며 흐르고, 그 균형이 맞춰질 때 비로소 수슘나의 길이 열린다고 해요.

요가 철학에서는 보통,

이 길을 통해 깨어나는 쿤달리니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것을 단순한 각성의 순간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다시 상상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해요.


그저 감각을 되찾고, 나의 흐름을 부드럽게 조율하는 순간들.

예를 들면 이런 순간이요.
수련 중, 발바닥이 고르게 바닥에 닿는 느낌.
숨이 왼쪽 폐에서 오른쪽 폐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흐르는 느낌.
그런 찰나들이 저를 작은 균형으로 이끌어요.

나의 중심선이 어디에 있든,

그곳으로 돌아가 보려는 상상.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하다고 느껴져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요가를 계속해요.

익숙한 쪽만 쓰고 더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나보다 먼저 그 기울어짐을 알아봐 주는 누군가의 시선이 고마워요.
나 자신보다 나의 중심을 먼저 알아봐 주는, 그런 말 한마디.
그게 저를 다시 돌아보게 하거든요.



[마음의 기울어짐에도 중심은 있다]

매트 위에서 중심을 상상하는 일은, 결국 매트 밖에서도 이어져야 하는 연습이라고 생각해요.

살다 보면, 감정에만 휩쓸릴 때가 있고, 논리만 앞세우는 순간도 있어요.

누군가는 마음이 먼저 흔들리고, 누군가는 생각이 먼저 앞서죠.
마치 MBTI에서 말하는 F와 T처럼요.

우리는 그렇게 이다와 핑갈라, 달과 태양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살아가요.

그런데 어느 한쪽에만 오래 머물다 보면,
처음엔 ‘조금’ 기운 것 같았던 판단이,
점점 기울어진 경사처럼 한쪽으로만 흐르게 되죠.
그 무게는 균형을 더 어렵게 만들어요.


몸이 한쪽으로 기울듯,
마음과 사고도 그렇게 한 방향으로 기울어요.
그리고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생각은 굳고, 마음은 더욱 무거워져서,
되돌아오는 길은 조금씩 더 험해져요.

그래서 저는,
몸의 중심선처럼 마음에도
조용히 하나의 선을 그려보려 해요.
그 선은 완벽하게 곧지는 않겠지만,
의식이 한쪽으로 쏠릴 때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기울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조용히 묻는 감각.

잠시, 멈춰서.


그 질문 앞에 머물러보면,

다시 내 안의 고요한 중심이 느껴지기 시작해요.

삐뚤어진 몸 안에서도,
한쪽으로 무거워진 마음 안에서도,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중심.

그 감각을 기억하길 바라요.




다음 편 – 옆사람 좀 그만 봐!

나의 중심, 수슘나는
내 몸 안에 흐르는 감각이에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 눈이 자꾸 남을 보고 있었어요.

잘 따라 하고 싶은 마음,
못 따라가는 내가 싫은 마음.

그건 비단 매트 위에서 만의 일이 아니었어요.
길에서 스치는 사람들,
인스타그램 속 멋진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 시선까지,

전부 이어져 있었죠.

다음 편에서는 ‘드리시티’라는 개념을 통해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감각이 시작되는 그 순간을 이야기해보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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