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작_사고의 오류 긍정하기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필수적으로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나 또한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나 또한 로봇이 아닌 인간이기에 실수를 저지른다. 그러나 나는 트라우마적 사고에 집착해 이 단순한 진리를 자꾸 잊어버린다.
그래서 어떤 일에든 대비하기 위해 1부터 10까지 머릿속으로 과도한 계획을 세운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라면 안 돼.’, ‘정신 차리고 대비해야 해.’, ‘여러 가능성을 두고 대책을 세우자.’
그럼에도 내 상상 속에선 늘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는다. 상담 선생님은 이게 내 '사고의 오류'라고 지적했다.
“그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상담 중에 나는 과거 경험을 떠올리고 그 상황에 머물러야 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던 시기를 간신히 지났던 참이다. 나는 덤덤하게 과거에 내가 ‘느꼈던’ 것을 말했다. 선생님은 그건 ’감정‘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고민하고 다시 답을 골라 말했다. 선생님은 그건 ‘생각’이지 ‘감정’이 아니라고 했다.
알고 보니 나는 감정을 표현할 줄도 느낄 줄도 몰랐다. 선생님은 계속해서 불편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거기에 머무르고 내 감정을 보게 했다. 내가 외면하고 깊이 묻어둔 과거의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난생 처음 맛보는 여러 감정들의 폭발에 혼란스러웠다. 그럼에도 나는 치료의 일환으로써 이 혼란조차 소화해야 했다. 처음에는 당혹감에 이를 거부했다. 나를 흔드는 상담에 반발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후 감정이 잦아들면서 차차 선생님의 말에 수긍하기 시작했고 나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 그때서야 나를 둘러싼 막에 금이 가는 걸 느꼈다. 변화는 그 지점에서 시작됐다.
감정은 뇌에 흔적을 남긴다
나는 당시 아빠의 사고를 막을 수 없었다. 아빠의 사고를 예견하고 대처할 수도 없었다. 나는 차에 치인 것처럼 아빠의 사고를 맞닥뜨렸다. 응급실 구석에서 우는 엄마와 동생의 손을 쥔 채로 눈물만 뚝뚝 흘렸다.
2003년 추석 다음날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지는 그날, 내가 느낀 공포와 충격과 두려움은 중학생이 스스로 처리하기에 과했다. 응급실 한 구석에서 의료진의 처치에 방해가 될까 봐 소리 내 울지도 못하고 다친 아빠에게 다가가지도 못했던 그 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공포와 함께 뇌에 짙은 상흔을 남겼다.
그 시기에 내 감정을 돌봐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과거의 감정들이 뇌에 각인됐다. 태풍이 오거나 바람이 불면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과거의 감정들이 신체적 증상으로 올라온다.
신체적 증상은 신체적 불편을 낳고, 불편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또 불안을 낳으며 큰 덩어리를 이룬다.
과거 경험을 약점이 아닌 강점으로
다만 무력했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선생님은 트리거가 눌릴 때마다 과거의 감정을 인지하되, 성인인 나는 다르게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렇다고 ‘과거의 무력감에 대응하기 위해’ 과도한 계획을 세우고, 한 시도 쉬지 않고 생각을 하는 것을 멈추라고 했다.
나는 내 사고의 오류를 인지해야 한다. 뇌는 주관적이다. 거기다 트리거가 눌리면 자동으로 신체적 증상이 올라와 불편해진다. 불편은 자동으로 불안이란 감정을 만들어 낸다. 그 감정은 진짜 내 감정이 아니다. 내 뇌 속 안전 경보기는 고장 났다. 여러 과정들을 동시에 처리하다 버벅대는 기계를 떠올려 본다. 그게 나다.
나는 과거의 무력했던 어린 나를 긍정해야 한다. 당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나쁜 게 아니다. 나는 당시의 나를 용서해야 한다. 더불어 과거의 사고는 예측할 수 없었던, 그저 지극히 운이 안 좋았던 과거 경험으로 남겨야 한다. 그로 인해 생긴 내 습관들이 약점이 아닌 강점이 되기 위해선, 내 뇌의 필터를 바꿔 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한다. 당연하다, 사람이니까. 인간은 신이 아니다.
그러니 인간은 모든 일에 대비할 수 없다.
이 단순 명확한 사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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