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이 부는 날의 일기
막상 정신과에 발을 들이고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과정은 불편했다. 한동안 말이 문장으로 나오지 못할 정도였다. 문장으로 풀어내는 걸 상상만 해도 목이 막히고 가슴속에서 감정의 파도가 일었다.
그즈음 나는 시를 썼다. 내 상태를 드러내기 싫어서 쪼개진 단어들 속에 나를 숨겼다. 시집을 하나 만들어야겠다 다짐했다. 언어유희라는 말재간 속에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숨기며 숨바꼭질을 즐겼다.
나는 요즘 나 자신이 ‘열린 책’ 같다고 느낀다. 나를 객관적으로 알기 위해 수술대에 나를 눕히고 내 옷을 풀어헤치고 흉터의 살을 벌렸다. 나는 흉터의 틈이 벌어진 상태로 봉합되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나의 불안과 마주하고 있다.
하필 세월호 9주기가 있던 지난주 제주엔 돌풍이 불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바람이 심히 분다. 인터넷에선 끊임없이 누군가의 부고가 올라왔다. 엄마는 또다시 수술 전처럼 아프다고 했다. 엄마 얼굴의 그늘이 내 마음에도 그늘을 드리운다. 내 상처를 봉합할 새도 없이 계속해서 상처 위로 소금이 툭툭 흩뿌려진다.
호기롭게 정신과 일지를 쓴다고 다짐했지만 또 말이 턱 하고 막힌다. 아직은 쏟아지는 감정들을 처리하는 과정인가 보다. 상담을 통해 머릿속으로 두루뭉술하게 구역별로 정리한 감정들을, 완연한 글로 다듬어서 쓰려니 또 서로 침범하고 섞이며 벽들이 무너진다.
오늘같이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은 원인을 알면서도 위축되는 날이다. 사실 감정보다 더 버거운 건 신체적 증상이다. 과긴장으로 인해 어깨가 굳고 척추의 긴장이 심해 기침을 할 때마다 허리가 아프다.
육체의 움직임은 둔한데 머릿속에선 뇌우가 내리치고 있다는 게 어이없기도 하다. 겉과 속을 까뒤집으면 무지개색 폭탄으로 터져 나올 생각들.
바람과 함께 휘몰아치는 생각들을 조각내 다음 심리상담 때 풀어놓을 계획이다. 그때까지 나는 셀프 도닥도닥을 연습하고 있다.
바람이 불어도 나는 안전하고, 성인인 나에겐 어떤 일이 생기든 대처할 의지도 능력도 있다는 걸 되새김질한다.
상담사 선생님의 말대로 나는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했고 열심히 살았다. 지금의 고통 때문에 과거의 내 노력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
과거의 모든 긍정적, 부정적 경험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작지만 단단한 내가 되었다. 과거의 경험을 약점으로 놔두지 말고 강점으로 활용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오늘따라 몸집이 큰 바람 속에 조심히 몸을 맡겨본다. 머리카락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려고 발버둥 치는 꼴이 제주에서 도망가려던 내 모습 같다.
정돈되지 않는 바람이 가진 혼란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 불안이 풍선처럼 커지기 전에 얼른 머릿속에 일렉트로닉 음악을 재생한다.
바람에 휩쓸려 좌우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모든 나무, 풀들이 내 마음과 함께 춤을 춘다. 빙글빙글 좌로 갔다 우로 갔다.
버티다 부러지지 않도록. 나도 저기 저 나무와 풀처럼 더 열성적으로 바람에 몸을 실어 본다. 빙글빙글. 빙그르르.
23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