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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는 May 16. 2024

”나 PTSD 올 거 같아.“

과제_PTSD 인정하기

”나 PTSD 올 거 같아.“


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쓸 정도로 트라우마와 PTSD라는 단어는 요즘 우리 일상에서 쉽게 남용된다. 그만큼 ‘트라우마’가 널리 알려진 덕이다.


사실 나는 PTSD(외상 후 트라우마 장애)는 전쟁을 치른 군인들이나 내전이 자주 발발하는 지역의 주민들이 겪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 또한 현재 PTSD를 겪고 있다. 사실 이 문장을 말하고, 쓰고, 내 스스로 인정하는 데에도 크나큰 슬픔과 비참함을 느낀다.


PTSD 치료를 위해 상담을 받으며 가장 힘든 부분은 버텨낸 과거로 망가진 나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망가졌다’는 말이 험하게 들릴지 모른다.


사람들은 공산품 하나를 사더라도 제품에 티끌 같은 얼룩이 묻어 있으면 기분이 상한다. 새 물건은 새것 티가 나야 기분이 좋다. 왜? 남들도 다 똑같은 새 제품을 가졌으니깐. 내 것만 처음부터 흠이 있는 걸 받으면 억울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리적 결함은 가치 절하를 의미한다. 이런 생각은 내 자신이 ‘망가졌다‘고 느끼게 했고 계속해서 과거의 감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았다.


나는 트라우마로 신경계가 오작동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내 몸에 흠이 생겼다고 느낀다. 식물이 비바람을 견디다 부러져 그 자리에서 새로 가지가 자란다 해도 부러졌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그 위로 새로운 가지가 자라날 뿐이다. 나는 그런 자연을 보며 비애를 느낀다.


때론 부러지고, 때론 사람의 손에 꺾이고, 발에 차이고, 햇빛을 못 받고 물이 부족해 시들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계속해서 자라는 자연물이 가진 강한 생명력이 경이롭기보단, 흉터의 흔적을 남기며 ‘그럼에도’ 자라야 하는 강한 생의 욕구에 잔혹함과 비애를 느낀다.


내 신체의 물리적 흉터들은 나의 강인한 생명력에 자부심을 갖게 했다. 하지만 내가 지닌 감정의 흉터는 걸핏하면 내 인생에 발을 걸고 나를 고꾸라트렸다. 20대부터 열정적으로 목표를 좇아 나가다가도 내 몸은 쉽게 다치곤 했다. 물리치료사 선생님은 내 몸이 너무 경직돼 있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몸이 더 다친다고 했다. 거기다 나를 위하는 주변 사람들을 계속해서 의심하게 했고, 결국 벽을 쳐 밀어내게 했다. 나는 줄곧 고립을 자처하는 인간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흠’ = 가치 절하


내게 흠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 힘들다는 내 말에 상담 선생님은 ‘흠’이란 표현 또한 내 주관적 해석과 평가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나의 트라우마적 사고관 안에서 ‘망가졌다’는 생각을 벗어나기란 어렵다.


이런 사고의 오류로 나는 오랜 기간 동안 남들에게 나의 순간적 불안과 공포를 쉬쉬하고 혼자만 삭이려 했다. 같은 일을 겪은 내 가족도, 어릴 때부터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본 내 친구들도 내가 트라우마를 겪는 걸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나는 남들보다 좀 더 예민하고 생각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이 둔한 게 아니다. 내가 숨겼기 때문이다. 트라우마와 함께 공포심이 발현될 때마다 나는 늘 감정을 억누르기 급급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입 밖으로 꺼내면 불확실한 공포심이 실체가 될 것 같은 불안이 컸다. 나는 늘 불안을 삼켰다. 그 누구도 이런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나는 점점 더 ‘고립’을 선호했고, 타인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가면을 쓰는 데에 익숙해졌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자부심


트라우마 치료를 목적으로 상담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PTSD 환자라는 걸 인정하기 어려웠다. 나는 살면서 우울증 약도 먹지 않았고, 인생에서 힘든 시기를 마주할 때마다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데 상담실에선 내가 삶을 대하는 방식이 ‘남들과 다르다’고 한다. 심지어 뇌의 신경계조차 고장 났다고 한다.


남들보다 뛰어난 인생의 성과를 낸 건 아니지만 늘 삶에 대해 진지했고,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겪었기에 성숙하다고 자부했다. 남들보다 뛰어나진 않지만 남들과는 ‘다른’ 점이 위기들을 헤쳐온 나의 강점이라 생각해 왔다.


그런데 상담 선생님은 보통 사람들은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했다. 내가 이제껏 나의 강점이라 생각했던 점이 강점이 아닌 약점이었다.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선 내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전부 수정해야 했다.


하지만 거기로 이성이 닿기도 전에 억울함이 나를 삼켰다. 나를 이렇게 만든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이 감정을 이겨내야 하는 걸까? 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지켜냈던 세계는 무너졌다. 나의 신념은 틀렸다. 나는 망가진 인간이다. 계속해서 내가 더 싸워야 하는 게 맞는 걸까? 나는 왜 아파야 할까? 지금의 위기를 또 극복한다 해도 또 반복되지 않을까? 왜 그래야 할까?


고립을 자처하는 동굴 인간들

그즈음 농담으로 트라우마와 PTSD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미웠다. 실제로 PTSD는 너무너무 내밀하게 이뤄져 고독하고 지독히 슬픈 일이다. 바람이 불고 마음에 그늘이 드리울 때, 미처 나도 의식하지 못한 채 어느새 내 왼팔의 감각이 달라질 때가 있다. 마치 비늘이나 깃털이 돋듯 피부의 특정 부위가 간지러우면서도 딱딱하다. 그 부위의 신경점들이 하나하나 느껴질 정도로 다 곤두서기 때문이다.


나는 피부에 비늘이 돋을 때마다 ‘신체화 증상이 또 시작했구나!‘ 하고 깨닫는다. ‘무엇이 날 불안하게 한 걸까?’ 보이지 않는 비늘들을 쓸어내듯 왼팔을 쓰다듬는다. 그리곤 일상의 어떤 지점이 내 뇌의 흉터를 자극했는지 차근차근 따져본다.


이런 경험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을까?  정상인들은 공감할 수 있을까? “앜ㅋ 나 PTSD 올 거 같아ㅋㅋ“라고 말하는 이들이 진정으로 트라우마가 일으키는 삶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단언한다.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절.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이 자처해서 자기 안의 동굴에 갇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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