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취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다. 나가는 길이 따로 있지도 않다. 무지개 색깔로 갓돌이 양쪽에 도열해 있는 둑방길이다. 비록 갓돌들은 철 지난 시공법으로 띄엄띄엄 박혀 있지만, 일 차선 도로가 직선으로 뻗는 마을에서 가장 그럴싸한 길이기도 하다. ‘연륙교’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쭉 돌다 보면 어느새 섬 한 바퀴를 돌게 된다. 나가려면 다시 이 길을 건너면된다.
연륙교를 건너면 오취마을이라는 마을표지석이 보인다. 그렇다고 이곳에서부터 마을이 펼쳐지느냐 하면 사실 그렇진 않다. 마을은 섬 정반대 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십 분 이상 더 걸어 들어가야 된다. 그럼에도 나는 이곳이야말로 마을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방문객들이 섬을 처음 보게 되는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단순한 도로였다면 그저 쭉 이어지는 길일뿐이겠지만, 이 길엔 표정과 이야기가 있다.
이 길은 ‘오도’로 묶이는 윗섬, 아랫섬, 두 섬을 잇는다. 그래서 윗섬에 있는 마을을 ‘상오’, 아랫섬에 있는 오취마을을 ‘하오’라고 부른다. 작은 섬들을 잇는데 수심이 깊은 곳에다 다리를 놓을 순 없는 노릇이라, 연륙교는 섬 사이에 있는 갯벌을 가로지르게 됐다. 섬 사이 가장 깊숙이 들어 가있는 갯벌이기도 해서 그 규모도, 조차의 정도도 크다. 바다는 매일매일 다르다. 달을 따라 물이 왔다 갔다 하고, 날씨에 따라 물길이 왔다 갔다 한다. 이만큼 바다가 변화무쌍할 노릇이니 이곳의 전경은 어찌 다르랴. 매일 똑같은 시간에 연륙교를 건너지만, 어느 날은 물이 쭉 빠져 황량한 분위기라면, 어느 날은 꽉 찬 물에 푸근하고 여유롭다.
물이 막 차오르고 있는 섬과 섬을 잇는 갯벌이다. 이 갯벌을 다리가 잇는다.
연륙교의 어릴 때 모습은 징검다리였다. 갯벌에 띄엄띄엄 바위를 던져놓았을 뿐이라, 물이 빠져야만 사람들이 폴짝폴짝 지나다닐 수 있었다. 그러다 해창만 간척사업의 잔석을 활용해 그 자리에 둑을 올렸다. 청년기에 접어들었다 할 수 있겠는데, 답게 바닷목을 막아놓은 치기 어린 모양새라 바닷물이 차올랐다. 비가 오거나 물이 많아지는 물때가 되면 둑이 잠겼고, 그 덕분에 연륙교는 보강공사를 몇 차례 더 해야 했다. 차로는 십여 분, 배로는 삼 분 거리 마을에 살고 있는 한 어르신은 학창 시절 비 오는 어느 날, 등교하기 위해 하오에 살던 여학생을 업고 물에 잠긴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연륙교는 오취마을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원래 하오사람들은 고흥보다 여수와 가까웠다. 역사적으로 인류의 주요 교통수단은 육상이 아니라 해상에 있지 않았던가. 자가용이 일반화되기 전, 인류의 교통편은 비용 면에서나 효율 면에서나 선박을 따를 게 없었다. 하오에도 정기여객선이 왔다 갔다 했었고, 많은 주민들은 그 배편으로 여수를 오갔다. 지금은 읍내버스가 들어와 매일 일곱 번씩 주민을 고흥읍으로 실어 나른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육상로를 연결하기 위해 연륙교를 지은 건 아니라는 게 주민들의 중론이다. 여기서 탄생비화가 등장한다.
80년대 고흥의 섬들은 석재산업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당시 토건에 대한 수요가 전국적으로 워낙 높기도 했고, 소규모의 석산개발은 별도의 환경영향평가 없이 지자체에서 허가할 수 있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거금도의 용두봉은 당시 훼손면적이 30만 평방미터에 달했는데, 환경영향평가를 피하기 위해 아홉 개의 업체가 땅을 분할해 고흥군의 허가를 받았을 정도였다. 하오의 ‘다리바위산’도 석재산업의 레이더망을 피해 갈 수 없었고, 1983년, 기어코 채석업체의 첫 삽이 떠졌다.
초창기, 마을의 숙원이었던 연륙이다. 당연히대부분의 주민들이찬성했다. 업체는 마을 뒷산에서 화강암을 캐 연륙교를 짓고, 그 다리로 석재를 실어 날라팔았다. 십 년이 지난 후, 결국 민심은 찬반으로 분열됐고, 여든여 명의 주민들은 상경시위를 벌이게 된다. 목표는 청와대였고, 당시 마을임원단에서 비켜나 있었던 청년과 여성이 반대 여론의 주축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래도 꽤 많은 주민들을 인터뷰해 왔는데, 인터뷰가 깊어지면 십중팔구 슬며시 나오는 화젯거리인 걸 보아, 당시 주민 간 갈등이 꽤 심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사십 년이 지났다. 분명 앙금이남아있는 게 틀림없는데 다들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들출 게 뭐가 있냐며 쉬쉬하신다. 그때마다 나는 뭔가 찝찝하지만 웃음을 지을 수밖에 다른 수가 있겠는가. 1993년에 보도된 기사가 있는데 주민들이 실명으로 인터뷰를 하셨다. 지금이야 모두 차분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신데 저 때는 저러셨다니, 이 분은 지금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저분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비교하는 재미가 솔찬히 있었다. 전설 같은 이야기도 하나 있다. 주민들의 상경이 시작되자 경찰이 연륙교를 통제했는데, 물이 빠진 갯벌로 걸어 나가는 거까진 어떻게 할 순 없었다고.
네이버 지식백과에 실린 예전 오취마을의 모습, 9시 방향에 옛날의 연륙교 모습이 보인다.
지금의 연륙교는 물이 오가는 '소통구'도 있고 아스팔트로 포장도 잘되어 있는지라 완숙한 장년의 모습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다. 나이가 찬만큼 순진한 연기도 잘한다. 심중에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겉보기엔 꽤나 의연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오취마을, 격동의 근현대사를 숨죽여 지내온 자그마한 섬, 이곳에 무슨 일이 있겠냐 싶겠지만, 다리를 건너와 보면 바다와도 같은 생동감이 숨겨져 있다. 다시 한번 생각해도 역시 이 연륙교는 섬마을의 입구로 소개되어도 될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