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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Oct 08. 2024

굴 패각과 벚꽃 잎

 공기가 차가워지는 겨울 초입, 오취마을의 마을어장에서 덩이굴이 채취되기 시작한다. 오취마을은 굴 알맹이를 까 도매상에게 넘기는 산업현장으로 변모한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 몇 분을 뺀 거의 모든 주민들이 굴막으로 동원되기에 마을은 한낮의 오수를 즐기는 듯 조용하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박신 작업은 종료되고, 굴막에서 배출된 굴 패각들은 오취마을로 들어가는 가로수 길에 쌓여간다. 가로수 길은 오취마을의 ‘재넘어들’과 물이 드니는 갯벌 사이를 비집고 들어섰다. 그리고 그 해안길을 따라 벚꽃나무가 띄엄띄엄 식재되어 있다.

 작년 초여름 오취마을에 들어왔으니, 실제로 벚꽃을 보게 된 건 반년이 지난 첫 봄을 맞이했을 때다. 마을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매일매일 출퇴근으로 오간 길이었지만, 평범한 가로수들이 있구나, 별 감흥을 가지지 못한 길. 갑자기 피어난 벚꽃에 너무 아름다워 놀랐다. 사실 감흥이 없을 법했다. 포털 지도의 위성사진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의 굴 패각더미들인데, 겨울 내내 적치되다, 초봄이 되면 본격적으로 썩기 시작한다. 수생동물의 흔적이 풍기는 바다냄새에 죽음의 냄새마저 섞인, 고약한 악취가 진동하니 그저 지나치기 바빴던 곳일 뿐이었다.


 한 주 동안 마을 일상에 녹아들어 창작활동을 했던 젊은 예술가들도 패각더미에서 ‘죽음’을 봤다. 패각더미에서 굴의 무덤을 연상하며 박신 작업 도중 하릴없이 죽어나갔던 작은 게들에 대한 연민을 투영했다곤 하지만, 사실 박신 작업을 체험하면서 죽을 맛을 느낀 게 아닐까 개인적으론 짐작하고 있다. 어쨌든 나도 종종 볼품없이 말라가는 굴 패각들을 보면서 황량함을 느끼곤 했었는데, 그곳에서 연분홍빛 흐드러짐을 목도하게 됐으니 인상 깊을 수밖에.     


위성사진으로 봤을 때 해안선을 따라 하얗게 쌓여 있는 것이 굴 패각더미들이다.


 그러다 불현듯 주민들과 꽃을 키우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주민들이 마을 골목골목에 화단을 가꾸는 활동은 마을만들기 정책사업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다. 심지어 유구하기까지 하다. 어느 골목길에 쓰레기가 무단으로 투기되는 장소가 있었고, 그곳에 주민들이 합심해 화단을 조성하고, 마을에서 책임지고 관리하니 쓰레기가 더 이상 버려지지 않았다. 뭐 대충 이런 노림수이다. 하지만 서울에서만 도시재생사업을 해왔던 나로선 화단을 만드는 활동에 살짝 회의적이었다.      


 경험에다 과장 좀 섞어서 사례를 하나 들겠다. 하지만 꽤 흔하다. 주민 일부가 보조금예산을 받아 화단을 만들곤, 이웃들이 함께 골목환경을 개선하는 경험을 쌓아야 한다며 바람을 잡는다. 행정,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는 좋다고 손뼉 치며 적극 지원한다. 하지만 그 조그만 화단도 어느 순간 방치된다. 화단을 조성한 사람들에겐 내 것도 아닌데 한평생 화단을 관리해야 할 유인이 없다. 주민 간 불화라도 생겨 사업 자체에 문제가 생길라 치면, 심은 쪽도, 그쪽을 싫어하는 쪽도, 심지어 행정, 센터까지도, 그 아무도 고작 ‘화단에 심긴 한 송이 꽃’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게 조성된 화단 위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는 광경은 한 줌 있던 마음도 식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실제 거주하는 사람이 예순여 명은 될까 싶은 섬마을. 벌써 주민 몇몇은 자신만의 화단을 가꾸고 계신다. 어떤 주민은 마을 어귀 길에 화단을 조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시기도 하신다. 그러면 주민들도 보기 좋고, 여행객도 좋은 인상을 가져갈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들에게 꽃을 키운다는 건 그리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일단 도시와 달리 햇빛과 구름과 바람이 의욕적으로 도와준다. 이웃들이 그 노고를 인정해 주고, 동네의 분위기가 바뀌는 게 체감된다. 게다가 여유로운 일상도 꽃을 키우는 의미를 찾게 하는데 한몫한다. 이들에게 무언가를 심고, 기르고, 거두는 건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화원을 조성해 고흥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된 쑥섬, 추천할만하다.


 그러다 보니 남도는 꽃 축제가 많다. 여행객에게 소구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여럿 있다. 우선 제주도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가장 빨리 발화하는 지역이라, 봄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고, 다도해, 지리산 등 자연환경이 수려하다는 것도, 고즈넉한 산자락에 숨어 있는 사적들이 많은 것도 유리한 요소다. 꽃이야 결국 풍경 속에서 피고 지는 것이니까. 무엇보다 이곳은 서울처럼 지가가 높지도, 신경증적으로 일상을 꾸려가야만 하는 곳도 아니다.     


 산수유 축제로 유명한 구례에 들린 적이 있다. 아쉽게도 산수유가 막 다 떨어진 시점이었지만 지리산 계곡을 따라 여러 마을을 이어 펼쳐진 산수유 숲은 잊을 수 없다. 꽃들은 죽었고, 열매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나무 사이 햇살이 쏟아지는 데크 길과 숲 속에 덩그러니 남겨져 개발을 멈춘 건물들만이 얼마 전에 있었던 축제의 열기와 붐볐던 인파의 잔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피고 지고, 태어나고 죽어가는, 생명과 죽음이 한데 뒤섞여있던 그 속에서 나는 산수유 꽃이 만개한 마을을 기다리게 됐다.     


 그리고 오취마을의 굴 패각 위에 내리 앉은 벚꽃의 꽃잎. 마침내 나는 그곳에서도 살아있는 숭고하고 비장한 죽음을 보게 됐다.      


굴 패각을 배경으로 피어난 벚꽃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예정’된 세계를 사유할 수 있게 하는, 실로 유일무이한 것이다. 신중히 둘러보면 흔하게도 널려 있는 죽음이다. 그 죽음을 거부해야 할 것으로, 또는 무언가의 끝으로 생각하는 대신, 이미 미래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는 죽음들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들의 관계는 다시 정립될 수 있다. 부조리였다면 의미를, 불평등이었다면 동등함을 찾을 것이고, 세상이 절망이었다면 허무 앞에서 살아낼 희망을 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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