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 인플레의 부작용
"할아버지, 내가 왜 엄마예요? 누나란 말이에요. 너무하잖아요!"
고객이 왕인 세상에 살다 보니 가끔은 호칭에도 인플레가 발생한다. 고객을 존대한다는 원칙은 어떤 이유로도 흠잡을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하지 않았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실물 경제에서 인플레가 우리네 삶을 힘들게 하듯, 호칭 인플레는 자칫 실수로 이어져 상황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몰고 간다.
필자는 횡성루지체험장 운영팀 소속이지만, 근무시간의 반 정도는 교육팀 소속으로 고객에 대한 안전교육 임무를 수행한다. 개인적으론 멀티플레이어로써 존재감을 높여서 좋고, 회사 입장에서는 인력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으니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임이 분명하다. 교육 중에는 다양한 사람들과 대면하는 즐거움이 솔솔 한데 이는 덤이다.
장맛비가 널뛰기 휴가로 심술을 부리던 어느 날 오후, 전재고개에 걸쳐 있던 구름이 물러가고 대신 많은 고객이 교육장을 가득 채운다. 교육장이 열기로 달아오르고 필자도 덩달아 신바람을 내본다.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려면 나름의 경험과 노하우로 집중력을 높여야만 한다. 어린아이들이 많을 경우 부모님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을 동원할 때도 있다. 어릴수록 집중력이 떨어져 그들을 하나로 묶어 통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가정에서 귀하디 귀하게 자란 친구들이 늙수그레한 타인의 말에 집중할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님 말이라면 적어도 듣는 척은 하게 되니 이를 적극 활용한다.
회사 방침에 따라 고객님이라는 호칭으로 통일하지만, 어린아이가 개입되면 어머님, 아버님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다. 교육을 마치고 출발선으로 이동 후 안전거리 확보를 위해 4~5명 단위로 간격을 유지하면서 출발시킨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경우 융통성을 발휘해 큰 무리가 없는 선에서 가족은 함께 출발하도록 유도한다. 문제는 교육을 마치고 출발선으로 이동하면서 서로 뒤섞여 가족 간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이럴 땐 일단 안전하게 호칭을 높이고 본다. 하지만 실수할 확률도 덩달아 높아진다는 사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호칭보다는 나이를 헷갈린 것이지만, 호칭 인플레에서 비롯된 일임에 틀림없다.
"어머님 앞줄에 있는 아드님과 함께 출발하세요. 안전 운전하세요."
순간 섬뜩한 눈빛과 날카로운 외침이 필자를 향해 날아든다.
"할아버지, 내가 왜 엄마예요? 누나란 말이에요. 너무하잖아요!"
" "
"내 나이 아직 30도 되지 않았단 말이에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선글라스를 끼다 보니 실수를 했습니다. 안전 운전 부탁드려요."
누나 얼굴은 불그스레 달아오른 체 형체가 변화무쌍한 와중에 여기저기서 낄낄대는 소리도 들려온다. 허접한 늙은이의 실수로 본의 아니게 주변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지만, 어머니라 불린 20대 꽃다운 누나는 마음이 많이 상했으리라. 여자 나이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고, 인플레하에서 적확한 호칭도 어렵긴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