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를 극복하라
'무릇 예란 인격적·도덕적으로 자타가 동등한 지위에 입각하여 서로 존중하는 때에 성립한다. 주종의 예, 군신의 예는 힘의 관계이지 예라고는 할 수 없다. 굴종의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
임제록에 나오는 ‘예(禮)’에 대한 경구다. 예를 악용하는 간악한 자들과 자신을 특별한 노예로 인정받길 원하는 비굴한 자들에 대한 통렬한 가르침이다.
조선왕조 통치이념인 유교사상의 근간인 ‘예’는 지배층의 위계질서를 정당화시키려는 그들만의 논리였고 오늘까지도 먹혀드는 뿌리 깊은 이념이다. 놀라운 것은 21세기를 살아가면서도 다수가 이를 인정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굳이 원인을 유추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너무도 공고하여 절대 바뀔 것 같지 않은 지배구조에 대한 인정 욕구이다. 무력감에서 오는 비이성적 판단이다.
둘째, 강자 편향 사고다. 강자 편에 붙어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안정 욕구이지만, 일시적 착시현상에 불과하다.
셋째, 자기만족 욕구이다. 예를 들면, 서울에 아파트 한 채라도 가지고 있으면 자신도 중산층으로 행세할 수 있으며, 알량한 그것이라도 지키려면 아무리 부패한 권력이라도 현 체제가 공고히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행복한 망상이다.
넷째, 베블런 효과다.(*)
마지막으로 무지다. 무지는 무관심이라는 병증을 동반하는데, 무지와 무관심이야말로 지배층의 논리에 순응하는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어쩌면 앞선 네 가지 원인 모두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예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사상의 일부 순기능을 인정하면서도 지배계층의 지배논리로 악용되는 역기능을 인식하고 극복해야만 한다. 극복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위에서 살펴본 순응 현상의 원인을 하나씩 제거하면 그만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말이 있다. 융통성이 없거나 자기가 세운 일방적인 기준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억지로 맞추려는 아집과 편견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를 악용하는 자들이여 악습임을 알면서도 전통이나 관습이라는 이유로 그릇된 예를 강요한다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깨닫지 못하다면 그의 최후처럼 되지 말란 법도 없음을 명심하라. 예라는 이념에 속박당하는 이들이여 부디 자각하고 깨우쳐라. 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과 이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을 멈추지 말라. 모두에 밝힌 임제선사의 예에 대한 경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사족)
(*) 베블런 효과 : 돈과 권력을 소유한 지배계층은 세상의 변화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에 보수주의 경향이 강하다. 반면, 하위 소득계층은 기존 제도와 생활양식으로 고통을 받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의 변화를 원하는 진보주의 성향을 갖게 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당장의 일상과 생존만으로도 힘겨운 가난한 사람들은 변화를 위해 기존 제도와 생활양식 문제를 파악하고 대안을 고민할 겨를이 없으며, 오히려 기존 방식에 적응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소모함으로써 기존 방식에 순응하는 보수주의 성향을 갖게 된다.
(**)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s bed) :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를 집으로 유인해 침대에 눕히고 다리가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버리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 역시 아테네 영웅 테세우스에게 똑같은 수법으로 죽임을 당한다.
누군가는 이 글을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필자에겐 정파와 여·야 구분 따위는 관심 밖의 일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