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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사탕 Aug 15. 2023

공간 그리고 곳간

'곳간에서 인심 난다'


옛 어른들의 지혜가 드러나는 속담 중 하나다.

사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기에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살아왔다.

인심을 마구 뿌려주고 싶어도 뭐가 있어야 가능하지, 월급일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는 발자취만 보아야 하는 일개미는 쌓아놓을 것이 없다. 


아니다.

애초에 나는 곳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푹 빠져보던 드라마 킹더랜드가 끝이 났다. 

해가지면 좀비모드가 되어버리니 뻗어버리기 일쑤. 그렇기에 날짜 맞춰 본방사수 할 여유 따위는 사치다. 그러니 완결까지 기다려 OTT서비스를 이용할 수밖에.(몰아보기는 사랑이다)


나이가 들었는지 요즘 로맨스가 자꾸 당긴다.

잘 생기고, 능력 있는 재벌의 남주와 나처럼 곳간마저 없는 일개미 여주와의 애틋하지만 해피앤딩의 이야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간질거리게 해 준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틀을 가지고 뻔한 내용을 꾸려가지만 식상하기보다는 보는 내내 눈이 호강스럽다. 어찌 멈출 수 있을까.


잘생긴 남자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백옥 같은 피부에 잡티하나 없는 공주님 같은 얼굴. 환상에 젖어 함께 보다가 고개를 들면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깜짝 놀라기 일쑤. 

아~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어불성설이지. 

난 이미 애가 둘 딸린 엄마인걸.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러한 여주인공에게는 주름하나 없이 팽팽한 얼굴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계속 드라마만 쳐다보니 공통점을 찾았는데 그들에게는 자신만의 곳간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이다. 가진 것 하나 없는 가난뱅이로 시작하지만 그들에게는 늘 소신과 꾸준함이라는 것을 갖고 있었다. 


사랑에 목을 매는 것처럼 신파적이고 무능력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법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본인이 꿈꾸는 것이 존재했다. 일평생 '나는 돈 많은 놈을 물어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아야지'라는 마인드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상황에서는 다를 수 있겠으나 적어도 화면 속 여주인공은 그렇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남자주인공이 빠져버리는 것이고.


시청자 입장에서도 그녀가 마냥 예뻐서 빠지는 것이 아니다.

불굴의 의지까지는 아니어도 스스로 정한 자신만의 스토리를 가지고 노력하는 모습. 물론 거기에 달콤한 사랑이 끼어 있어서 재미를 더하기는 하지만 영상 속 여주를 응원하는 건 그녀들이 정한 자신의 공간을 멋지고 풍성한 곳간으로 만들어가는 모습 때문이다. 


흔히 '일하는 남자는 멋있다'라는 말이 들리는데 이는 비단 남자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일을 멋지게 해내려 에너지를 쏟는 열정은 결국 성별을 떠나 인간으로서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좌절하거나 슬프게 여기지 않는다. 

현실의 장벽에 무너질 때도 있고, 힘에 부쳐 넘어질 때도 있으나 결코 비관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남들이 전부 '끝났다'라는 표현을 쓰는 환경에 놓여 있어도 자신의 스타일대로 묵묵히 나아간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보인대도 그 와중에 긍정의 힘으로 서두르지 않고 한 계단씩 밟아 가는 것이다. 

재벌 애인이라는 꿀팁이 명확하게 주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히든카드를 사용하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애를 쓴다. 그 모습에 시청자와 남자 주인공은 끌릴 수밖에 없다. 


그녀들의 성공기는 애초부터 곳간이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멈추지 않고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희망이 존재했다.

허허벌판 속에서 다 쓰러질 법한 곳간처럼 보이지만, 재물로 가득 찬 곳간은 아닐 지어도 마음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무언가는 분명 가득 차 있다는 걸 알게 해 준다. 그리고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아닌 작은 것 하나라도 주변에 나누어줄 인심은 이미 충만했다.


누구에게나 공간은 존재한다.

작은 한반도 안에서 서로 한 뼘의 땅을 가지려고 아귀다툼을 할 필요도 없다. 그 공간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니까 말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공간을 얼마나 넓힐지는 나 자신이 결정할 일이다.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지는 곳간은 내 맘대로 만들 수 있다.


통장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뭐 하나?

그 속에 들어있는 금액이 중한 것이지.


금칠로 도배된 허울 좋은 곳간보다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가 나를 여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다.

비록 얼굴도 잘 생기고, 돈도 많고, 능력도 많은... 거기에 세상 사람을 적으로 만든대도 나만 바라보는 재벌 애인은 없을 수 있다. 애초에 그런 남자가 내 주변에 있을 수도 없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은 이미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혼 10년 차에도 아직까지 내가 최고라고, 나만 사랑한다며 응원해 주는 남편이 있다.

눈 밑 주름에 잡티 가득이지만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예쁘다고 무한 사랑을 뿜어주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미래를 위한 꿈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비어있는 텅장을 소유하고 있으나 이것 만으로도 이미 나의 곳간은 가득 찰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툴툴대는 것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되돌아보고 그것들로 나의 공간에서 곳간을 만들고 채우면 된다는 것이다. 사실 드라마는 허구일 뿐이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있는 나이가 되니 한편으로는 씁쓸하지만 적어도 헛된 꿈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좌절하지 않게 된다. 지금 당장 잘생기고 능력 많은 재벌 남편을 만들 수 없으니 과감하게 패스해 버리자. 대신 내가 꾼 꿈을 어떻게 해서든 이루겠노라 하는 목표는 설계할 수 있다. 그걸 귀찮음과 나태함으로 던져버리는 미련은 던져버리자. 그 정도의 선택은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가진 것이 없어도 분명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은 존재한다.

지금 당장 내가 설정한 목적을 향해 이동할 방법을 찾고 실행에 옮기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그리고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닌 주변에 퍼트리다 보면 자연스레 내 곳간은 점차 가득 차질 것이다.


비어있는 공간을 곳간으로 만드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그저 묵묵히 걸어가면 된다. 

내가 스토리의 직접 주인공이 되면 충분하다. 

어차피 누가 대신 살아줄 인생도 아닌데 내 마음껏 드라마 찍으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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