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집안일 그리고 어색한 외벌이

by 그냥사탕


드디어 오랜만에 햇살을 보며 따듯한 커피를 마시는 아침 시간을 맞이했다.

비록 노란 봉지의 믹스커피였지만 이 순간 느껴지는 그 깊이는 남달랐다.


퇴사 후 맞이하는 고요한 평일의 아침. 많은 고민을 뒤로한 채 감행한 겁 없는 도전은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오묘한 그 자체였다. 전날까지만 해도 새벽에 일어나 출근을 위해 분주했던 기억들이 어색하게 다가왔다. 큰 아이의 전학 수속을 마치고 생각지도 못했던 유치원에 덜컥 당첨이 되어놓고 보니 어리둥절한 상태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아이들을 각 기관에 보내고 집안일을 돌보며 나만의 시간을 갖는 여유가 생겼다. 적어도 퇴사 초반에는 그렇게 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동시에 예측했던 어려움도 함께 찾아왔다.


첫 번째는 반토막 난 수입이었다.


외벌이가 되면서 나를 반겼던 것은 비어있는 통장이었다.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입장에서 반토막이 난 수입 감소는 내가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로 떠올랐다.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를 하면서 그동안 모아놓았다고 여겼던 귀여운 저축들은 봄날의 눈송이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기댈 곳은 알량한 퇴직금뿐이 없었다. 더 이상 나에게서 단 1원도 수입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정신 차리고 알뜰하게 꾸려나가야만 했다.


직장을 다니던 시절에는 작지만 꾸준히 받던 급여가 숨통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오롯이 남편의 월급으로만 생활해야 하는 상황을 일상으로 만들어야 했다. 앞으로 아이들의 교육비, 생활비 등을 고려하면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했다. 그것에 대하여 내가 직접 선택한 것이기에 비관하거나 누구의 탓을 할 필요도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여기에 두 번째는 아이들과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퇴근 후 저녁 식사와 잠자리 시간에만 마주했던 그 순간. 항상 찰나라고 느낄 정도로 짧았다. 그런데 가정주부가 되고 나니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다. 오히려 학교 방학과 겹쳐서 24시간으로 길어졌다. 처음에는 그 부분 때문에 이 길을 택한 것이지만 평소 무뚝뚝하던 나에게 의외의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은 치우고 돌아서면 보다 빨리 원상태로 돌려놓는 마법을 부렸다. 그냥 얼굴만 보아도 좋을 것이라 여겼지만 살림과 육아를 동시에 하는 순간들이 자주 생기니 조금씩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꼬맹이들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엄마의 존재를 원하던 꼬마 천사들과 비어있는 텅장을 위한 새로운 일상에 빠르게 적응해야 했다. 무엇보다 내가 가정주부를 선택한 이유를 잊지 말아야 했다.


비어있는 냉장고를 채워 넣으면서 또 한 번 다짐한다. 우리 집에 들어온 이상 버려지는 식재료들은 없을 것이라고. 빈 종이에 냉장고 지도를 만들고, 주말에 다음 주 식단을 적어가며 생활비를 현명하게 꾸려나가고자 노력했다. 체력이 바닥이라 몸으로 놀아줄 수 없는 어미에게 함께하는 순간을 만들고 싶어서 육아서와 각종 '엄마표'에 대하여 공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자질구레한 문제점들이 매일, 그리고 꾸준히 발견되었다. 그것이 퇴사 전과 후 모양만 다를 뿐 여전히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헛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내 깨달았다.


2학년 첫 학기가 시작된 후 하교 시간에 맞춰 교문 앞에 서 있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행동에 스스로가 어색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집에서 학교가 코앞이라 아이 혼자 걸어 다녀도 후딱 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하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에 굳이 등하교를 함께 했다. 신학기에 전학을 온 입장이라 아는 사람도 없었다. 주변에 있는 1학년 신입생 엄마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한 채 한동안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힘들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난 후 정문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아이가 보였다. 나를 보지 못했는지 무표정의 땅만 바라보는 아이. 두 팔을 활짝 펼쳐 파리처럼 양쪽으로 퍼덕거리며 엄마의 존재를 어필하자 그제야 두 눈이 반달로 바뀌었다. '엄마~!' 하며 큰소리로 나를 부른다. 그리고 이내 양팔을 벌리고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아침에 헤어지고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함박웃음을 짓고 볼록 튀어나온 똥배에 얼굴을 비비는 모습을 보니 나 또한 반가움이 가득 찼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엄마를 만나 너무 행복했어요!"


틀에 박힌 식상한 질문에 뜬금없는 고백이라니. 감정표현에 서투른 나지만 감동을 받는다.


1학년 내내 방과 후 돌봄 교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태권도를 다녀오는 아이였다. 홀로 하루를 꾸려갔던 아이. 늘 씩씩해 보여서 항상 괜찮은 줄 알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한 마디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동안 엄마가 데리러 오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어요"


부모는 늘 주는 입장이라지만 하교를 도와주는 간단한 일조차 해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너무 미안했다. 분명 한 시간 전에 점심식사를 했을진대 어째서인지 계속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린다. 따듯하고 조막만 한 손을 사이좋게 깍지 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놓은 간식을 주었다. 예전에 소원 중 하나가 집에 오면 엄마가 간식 챙겨주는 것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별 것 아닌데 입안 가득히 욱여넣고 역시나 반달눈을 한 채 또다시 행복하다고 알려준다.

그래. 내가 퇴사를 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무엇이든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내가 지금 선택한 이 길이 불편과 단점 가득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 숨겨져 있던 장점이 보다 막강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리적으로 무서웠던 반토막의 수입이었으나 외벌이면 어떠하랴. 내 아이들이 엄마가 집에 있어 행복하다고 하는데 말이다. 지금은 그 한마디를 위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금전적으로 부유해도 마음이 공허하면 의미가 없다. 그 마음을 가득 채워 넣는 길이 통장을 가득 채워 넣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이 그 때라는 걸 받아들여야 할 순간이다.


새로운 모양으로 다시 만난 육아와 살림이지만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바로 그것이라는 걸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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