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

by 그냥사탕

2024년 6월 21일


오늘은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아름다운 날이다.

아이들은 학교와 유치원으로 갔고, 남편은 출근을 했다.


텅 빈 집안에 남겨진 나에게는 드넓은 시간이 펼쳐졌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포장하고 싶었다. 과거 워킹맘일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여유로운 시간이었지만, 가족 모두가 떠나간 자리는 폭풍이라는 테러의 잔해들이 남아있었다.


맞벌이를 그만두고 가정주부가 된 지도 어느새 6개월이 흘렀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며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여러 일들을 조금씩 헤쳐나가며 지금껏 이렇게 잘 버텨왔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기특하다고 여기게 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라는 존재를 그저 한 명의 사람으로서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사회 안에 속해야만 한다고 여겼다.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억울함'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서 다시 일을 하게 되었는데...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니 집에서 가정주부를 하고 있어도, 직장에 나가 생업을 이어나갔을 때에도 '나'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똑같았다. 그저 상황이 변했을 뿐. 그 점을 이제야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구시대적인 발상일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촌스러운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기에 퇴사를 하던 그즈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누구의 엄마, 아내로서만 남는다는 불안감과 무기력이 동반되었다. 누가 뭐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왜인지 스스로 한계를 지어 놓았던 것이다.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을 챙기는...'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다짐했던 초심은 이미 아득히 머나먼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들이 무의미하고 값어치 없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출근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과 동시에 하루종일 갇혀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스스로를 죄어왔다.

그래서였을까.

이런 마인드가 지속되던 순간 점차 쪼그라드는 나를 조금은 펴주고 싶었다.


냉장고 정리를 하고, 집안 청소를 시작했다.

예전에는 바쁘니까, 나도 일을 하고 있으니까, 피곤하니까 등 구차한 핑계들을 앞세워 뒤에 서서 모른 척해왔던 것들을 '나는 주부니까'라는 생각에 밀려 더 이상 외면하지 못했다. 엄청 하기 싫음에도 피할 수 없기에 시작했지만 막상 해보니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정리는 잘 못할지라도 한 가지를 하면 뒤따라오는 깨끗한 공간이 성취감을 가져왔다.


바쁘다는 이유로,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책을 손에 들었다.

읽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휙휙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책장을 넘기며 잃어버렸던 독서의 기쁨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사라졌다고 여겼던 감정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책 안에서의 경험은 새로운 세상을 다시 만나게 해 주었다. 이렇게 꾸준히 하루 한 페이지, 두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며 그동안 숨어있던 감정에 대해 직면하는 시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환경이 나를 멈추게 했다고 불평하던 속마음은 조금씩 가라앉았고, 앞이 깜깜하다고 투덜대던 시야는 다른 방향도 있다는 걸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나라도 분명 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들었다. 여전히 길을 잃고 몽롱한 상태이지만 되찾게 된 독서라는 취미는 나를 조금씩 도전이라는 걸 하라고 뒤에서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책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생각보다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에게 하루를 온종일 쓸 수 있는 시간은 여전히 부족했다.

나는 엄마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정주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만의 시간을 확보해야 했다. 주어진 24시간 중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오롯이 나 혼자 놀 수 있는 그런 시간 말이다. 그건 바로 새벽이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찰나의 기특한 그 마음을 굳건하게 지켜주기 위해서는 새벽을 괴롭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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