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희랍어시간> / 최유리, <단짝>
어떤 노래를 들었을 때, 분명 처음 듣는데도 익숙할 때가 있지. 사실 자주 그렇긴 해. 에머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처음부터 내 안에 존재하던 그것들은 낯설고 장엄한 모습으로 다시 나에게 돌아와.' 하지만 최유리의 <단짝>을 들었을 때는 정말로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느낌이었어.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어. 예전에 읽어본 적 있는 책이었어. <희랍어시간>은 점점 눈이 멀어가는 남자와 언어를 잃어버린 여자의 이야기야. 둘 다 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아. 여자의 아들이 했던 것처럼, 인디언식으로 남자의 이름을 붙여보면 '반쯤 잠든 꿈의 읊조림' 정도일까. 이 사람은 꽤 많은 부분을 독백으로 풀어내거든.
어릴 적부터 친구로 지내다 절연한 사람의 부고를 받고 그 의미를 정리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야. 침대에 누워 최소한의 식사를 하며 어둑한 천장을 응시하지. 과거와 그보다 먼 과거와 현재를 오가다 결국 이렇게 읊조리고 말아.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이 말을 최유리의 <단짝>은 이렇게 노래해.
난 이제 잃을 게 없으니
너를 한 번이라도 안아줄 걸 그랬지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박제하는 게 가능할까? 마치 소중한 물건을 레진 안에 넣고 굳히는 것처럼.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인간관계에서 그런 바람을 가져왔던 것 같아. 가장 즐겁고 다정한 관계에서 혹시 멀어질까 봐 두려워 연락을 뜸하게 하고, 그렇게 종종 꺼내볼 수 있는 추억으로 영원히 남길 바라는 거 말이야.
https://youtu.be/Z1zCYd7iF2Q?si=Gu6QotwoLhAGq49A
그래 잃어버린 게 나을지도 모른다며
너를 애써 외면했던 나를 용서해
있지 우린 그때 서롤 바라볼 때
마음 아픈 날 다 멀리 사라지길 바랬어
그래 우린 웃어야만 하지도 않았었는데
애써 외면했던 나를 용서해
처음 <희랍어시간>를 읽었을 때 유독 이해하기 어려웠던 장면이 있었어. 친구의 죽음을 정리하는 도중에 뜬금없이 스위스로 여행을 갔던 일화가 나오거든. 잠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주인공은 낯선 사람과 친근하게,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스몰톡을 나눠. 얼마 지나지 않아 배를 타고 선착장을 떠나고 상대는 손을 흔들어주지. 그런데 이런 감정이 묘사되어 있어.
그때 왜 그렇게 가슴이 서늘해졌던 걸까.
느리디느린 작별을 고하는 것 같던 그 광경이, 헤아릴 수 없는 무슨 말들로 가득 찬 것 같던 침묵이, 여태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마치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대답해주었던 것처럼. 뼈아픈 축복 같은 대답은 이미 주어졌으니, 어떻게든 그걸 내 힘으로 이해해내야 하는 것처럼.
그때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이해해. 우리는 각자의 선착장에 서 있으니 언젠가 곁에 있는 사람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이 사실을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다 확신하지만, 진실로 겪게 되면 전혀 다른 느낌일 거라는 것도.
그렇다면 역시 그때 너를 안아주어야 했을까? 현명하게 미래에 겪을 후회를 생각하며 그때의 행동을 바꿨어야 했을까 되묻게 되지.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희랍어시간>을 다 읽지도 않았는데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었어. 아니, 그럴 수 없어. 나는 무너졌을 거야. 그건 나를 해쳤을 거야. 그때는 그 모든 일들을 겪고 후회하는 지금의 내가 아니었으니까. 저 문장들을 읽었을 때 얼마나 사무치던지. 그렇지만 과거의 내게 권하진 않을 거야.
그럼에도 문득 깨달을 때가 있어. 얼토당토않은 행동을 하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알게 되는 거야. 당시의 나로선 내릴 수 없는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걸 말이야. 마치 미래의 내가 전신이라도 보낸 것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이 대단한 건 무언가를 뛰어넘는 힘이 있기 때문일 거야.
있잖아 난 그때 나를 바라볼 때
그게 나인지도 모르며 널 사랑했어
그러니 이젠 이 가사에 의미를 담을 수 있지. 그토록 널 사랑하던 나는 가끔은 지금의 나였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스스로가 무섭도록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