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너를 만나러 왔다는 고백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by 흰새결

2024년 12월엔 유독 연말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한민국 역사상 두 번째 계엄이 선포되고 암흑 같던 밤을 지새운 시민들은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일과를 끝내고 휴식이 이뤄져야 할 시간에 국회의사당역과 광화문은 인파로 가득 찼다. 이 중 다수를 차지한 10~30대 여성들의 손에는 촛불 대신 응원봉이 쥐어져 있었다.


2016년 이후 변화한 시위 문화는 노래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마치 응원봉과 맞춘 듯한 아이돌 음악부터 청년층에게 익숙한 아티스트의 곡이 시위곡으로 흘러나왔다. 모든 노래가 각기 재치 있고 뛰어난 싱크로율을 자랑했지만, 이번 민주주의 시위는 명실상부한 대표곡이 있었다. 탄핵이 가결된 직후 흘러나온 '다시 만난 세계'이다.




처음 '다시 만난 세계'를 시위곡으로 제안한 사람이 누구였을지 궁금하다. 2016년 8월 이화여자대학교 시위를 기점으로 재해석은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무력 진압이 시작될 듯한 팽팽한 대치 상황 속에서 학생들은 스크럼을 짠 채 ‘다만세'를 불렀고, 이 영상은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후 여대 시위에서 빠지지 않는 곡이 되어 동덕여대 시위에서도 불려진 바 있었다.


https://youtu.be/Lo3UMxYFNW0?si=OI4LjJ0oDtw8f6XQ


노래만 따로 떼어두고 보면 ‘다시 만난 세계‘는 가사와 멜로디가 비장하지 않고 도리어 여린 축에 속한다. 어째서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시위곡에 익숙한 세대마저 아우르며 공식석상에서 채택될 수 있었을까? 이번 시위에서 '다시 만난 세계'가 이렇게 설득력이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되짚어보려 한다.




https://youtu.be/mbg1Cn6Ua9U?si=DSgcN-tEI7voglow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연애 감정 이상으로 투쟁과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가사가 정체성을 잡아준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마
눈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주제부는 총 두 번에 걸쳐 다뤄볼 예정이다. 표면적으로는 시위곡에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지만 강력한 에너지를 실어주는 파트이다.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이는 대치하고 있는 상대에게 건네는 말이 아니다. 이화여대 시위에서는 마지막에 '이화'를 이어 불렀다. 그때의 '너'는 이화여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시위에서는 무엇이었을까? 이미 눈치챈 사람도 있을 것 같지만 계속 노래의 흐름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불합리한 비극은 끊임없이 반복되기에 여기서의 작별은 내면의 성장을 뜻한다. 이제 슬픔은 더 이상 고통으로만 남지 않는다.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지만 아직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이윽고 감정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주제부는 간결하고 간절하게 되돌아온다.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 밤 우리는 '너'를 단 한순간도 잊을 수 없었다. 높게 치켜든 응원봉은 각자의 삶에서 반짝이는 조각이자 무엇보다 지키고 싶은 일상이었다. 광장의 까만 밤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건 수많은 '너'의 물결이었다.


이 순간의 느낌,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이유를 온전히 이해한다. 그리고 ‘나'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로 넓어진다.




여전히 일각에서는 시위와 같은 정치적 집단 활동이 터부시되는 경향이 있다. 다수의 사람이 하나의 목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선동이나 세뇌처럼 개인의 주관을 말소시키는 전략이 쓰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한 경우 시위에 참여한다는 말이 마치 주체성을 상실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번 응원봉 시위는 이러한 통념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여러 팬덤이 지닌 각양각색의 응원봉은 참여자 한 명, 한 명이 전부 다른 개성을 가진 존재임을 증명했고 그와 동시에 무엇을 지키고자 한 마음으로 이곳에 섰는지 보여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작은 불빛이 되어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표상하고 있었다.


아이돌 노래를 시위곡으로 쓸 수 없다고, 응원봉이 무슨 소리냐고 질타했다면 영영 볼 수 없었을 장관이었다. 틀에 갇히지 않는 의외성은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마치 불공정한 싸움에서 이기려면 짜여진 판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룰에 갇혀 눈앞에 상대를 쓰러뜨리는 게 최종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가로막힌 그 너머에 너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을 뿐이다.


https://youtu.be/p97tLPIoQhs?si=IoiZK7YX0BG7c_rS


keyword
이전 16화‘그럼에도’라고 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