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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퍼스 파라다이스에서 운명처럼 만난 헝가리 언니

by 인생 탐험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선물처럼 찾아온, 나의 소중한 이방인 친구, 안드레아. 닉네임 앤디. 국적은 헝가리. 사는 곳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의 브런스윅. 단조로운 모노톤의 옷을 입는다거나 뻔하게 유행하는 옷을 입었다가는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항상 알록달록한 색상의 옷이나 갖가지 꽃이 만개해 있는 원피스를 즐겨 입는다. 자연 태닝된 구릿빛 피부에, 나는 30만 원이나 주고 했던 흑발의 히피펌이 내추럴로 장착되어 있는 여자. 지나가는 사람 100명에게 물어보면 100명 중에 99명은 ‘인상 참 좋으시네요’라고 대답할 만한 건강한 기운을 지닌 사람. 아, 참고로 100명 중에 1명은 시력이 안 좋아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일 것이다.


많은 세월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서른을 넘게 살다 보면 생긴다는 ‘촉’이라는 게 있다. 앤디를 만나기 전부터, 내 안의 그 촉은 이미 말하고 있었다. 아마 그녀와 나는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될 거라고.


2019년, 번아웃과 극심한 공황장애로 직장 생활이 어려워진 나는 3개월의 휴직기간 중 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었다. 기독교인이 아닌지라 딱히 크리스마스를 챙기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나에겐 특별한 그 무엇이 필요했다. 그래서 구매했다. 서울에서 호주로 가는 골드코스트 직항 티켓을. 골드코스트행 티켓을 구매한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겨울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티켓 값이 저렴해서.


크리스마스-연말 시즌이 연중에 가장 바쁜 극성수기인 골드코스트는 이미 80퍼센트 이상의 숙소들이 예약되어 있는 상태였다. 휴직으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데다 위치가 마음에 드는 호텔도 없어서, 적당한 가격이든 괜찮은 위치든 하나만이라도 걸리기를 바라며 취소 예약을 기다리던 어느 날, 완벽한 숙소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해변 앞 3분 거리, 관광 중심지인 서퍼스 파라다이스에 위치한 에어비앤비. 가격마저 말도 안 되게 저렴했으나 단점이 하나 있다면 호스트와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 호스트와의 한 집 생활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마저도 아쉬운 처지인지라 일단 예약부터 걸어두었다.


‘호스트가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하지? 요즘은 에어비앤비 범죄도 많다는데, 먼 타지로 혼자 가는 여행에 에어비앤비가 괜찮을까?’

하지만 대안이 없었고 예약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위치와 가격이 좋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불안함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던 어느 날, 여행을 코앞에 두고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그녀가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26일 아침에 도착하는 거 맞죠? 그날 저녁에, 파티가 있는데 같이 갈래요? 드레스 코드는 화이트예요.”


같이 지낼 호스트가 이상한 사람일까 걱정하던 나와 달리, 호스트는 연말 시즌을 함께할 게스트와 파티 동행을 고려할 만큼 걱정 따위 없는 쿨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정말 ‘예스’를 외쳐도 될까 싶어 소셜 미디어에서 그녀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프로필 사진 속에는 따스한 미소와 친근함이 묻어나는 헝가리 여자가 있었다. 관상의 마법을 믿는 민족답게 나의 불안은 서서히 사라졌고, 어느새 나는 옷장에서 흰 원피스를 꺼내 여행 가방에 야무지게 챙겨 넣고 있었다.


얼마 후, 매서운 추위의 한국을 떠나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골드코스트에 도착하였다. 날도 더운데 길까지 헤맨 탓에 잔뜩 지친 난, 고급 고층 건물이 즐비한 서퍼스 파라다이스의 중심부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2층짜리 건물로 들어섰다. 여름의 나라에 왔다는 것이 너무나도 확연히 느껴지는, 꽃무늬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호스트가 날 반겨주었다. 집 안은 고소한 진저 쿠키 향으로 가득했고, 거실 TV에서는 바다 한가운데서 열리는 세일링 보트 경주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녀는 직접 구웠다는 별과 사람 모양의 진저 쿠키를 내밀며 말했다.


“난 앤디예요. 안드레아가 내 이름인데 다들 앤디라고 불러요.”

“내 이름은... 지영이에요.”

“그럼 줄여서 ‘지’라고 부르면 되나요?”

“뭐, 원하시는 대로... 하핫.”

앤디의 웰컴 진저쿠키

‘지-?’ 라니 뭔가 어색했다. 마치 풀네임을 까먹어서 부르다 만 것만 같은 이름. 그러나 일회성으로 한 일주일 불릴 이름으로 생각했기에 그녀가 나를 ‘지’라고 부르던 ‘영’으로 부르던 원하는 대로 부르라 하였다. 물론 그 당시엔 이것이 6년째 앤디가 나를 부르는 이름으로 고정될 줄은 몰랐다.


웰컴 쿠키를 먹으며 앤디의 집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집은 2층짜리 건물 중 1층에 위치한, 우리나라로 치면 24평 정도의 크기에 방 2칸이 있는 집이었다. 오래된 건물 안, 집 안은 오래된 아늑함과 그녀만의 독특한 취향으로 가득했다. 알록달록한 색감이 돋보이는 서랍장, 벽면에 걸린 그물과 그물 위에 걸린 조개껍질과 불가사리들, 그리고 전 세계 도시에서 모아 온 엽서들까지. 자유로운 영혼이 느껴지는 집주인의 취향을 똑 닮은 집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발견한 네팔의 타르초 스타일의 6개의 깃발. 나는 각 6개의 깃발에 적힌 한자를 천천히 읽어보았다.

“愛, 安. 智, 英, 平, 福...? 엇! 이거 내 이름이잖아!! 여기 적힌 한자!! 내 이름 한자가 정확히 이거예요!”

내 이름이 이 집에 걸려있다며 흥분한 나에게 앤디는 기뻐하며 말했다.

“당신은 이곳에 올 운명이었나 봐요.”

그 순간, 낯설게 느껴졌던 타지의 공기가 내 마음으로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우연 같았던 만남이 필연처럼 느껴졌고, 여행의 설렘이 인연의 시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마주친 앤디와의 만남이 평생을 함께할 인연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바로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나 오늘부터 당분간 쉬는데, 우리 같이 휴가 보낼래요?”

그날 오후 앤디가 나에게 물었다. 세일링 보트에서 일하는 그녀는, 그녀의 상사가 아까 tv 생중계에서 본 보트 경주에 참가 중이라 며칠간 휴가를 받은 상태였다. 혼자 하는 여행에 꽤나 익숙한 나였지만, 낯선 도시에서 유쾌한 동행을 만난다는 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막 처음 만난 사이’에서 ‘함께 연말을 보내는 친구’가 되기 시작했다.


“Egészségedre! (건배)”

샴페인에 에너지 음료를 섞은 잔을 내밀며 그녀가 외쳤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에기시게드레!”로 화답했다. 헝가리 억양을 곧잘 흉내 내는 나를 보며 그녀는 첫 옹알이가 터진 아기를 보는 엄마처럼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 여행에서 가장 큰 선물은 목적지가 아니라, 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앤디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어느새 우리는 자연스럽게 낯설지만 설레는 첫 인연을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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