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바닷가에서 한국인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은 ‘래시가드’를 입은 사람을 찾는 것이다. 원래 래시가드는 서핑 보드에 몸이 긁히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옷이라고 한다. ‘Rash(발진)’로부터 몸을 ‘Guard(보호)’하는 것. 그러나 한국인들은 래시가드를 주로 햇빛과 노출을 막기 위해 착용한다.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해변에서는 비키니보다 래시가드가 훨씬 익숙했고, 초라한 몸매를 남들 앞에 드러내는 건 늘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앤디와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한 후 그녀와 처음 바닷가에 가던 날, 나는 수영복보다는 적당히 시원해 보이는 긴소매 옷에 먼저 손이 갔다.
12월의 작열하는 태양, 푸르름과 광활함을 품은 골드코스트의 해변에 도착한 나와 앤디.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앤디는 기다렸다는 듯 상의를 탈의했다. 고대 명화에서 튀어나온 듯 굴곡진 몸매와 구릿빛 피부가 하얀색 비키니와 어울려 눈부시게 빛났다. 커다란 비치 타월을 모래사장 위에 펼친 후 일광욕을 즐기는 그녀. 나는 여행 블로그에서 필수템이라고 소개한 ‘휴대용 1인 돗자리’를 꺼내 들고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물에 젖지 않는 비닐 돗자리를 주섬주섬 펼치는 나를 관찰하며 앤디가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이봐, 난 기능성 한국인이라고...’
개의치 않으려 했지만 이 해변에서 바시락 거리는 비닐 위에 앉아있는 건 오직 나뿐이라는 걸 깨닫고 괜히 멋쩍어질 때쯤, 앤디가 파란 자수가 놓인 내 긴팔 셔츠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자수, 헝가리 전통 문양이에요! 근데 너무 덥지 않아요?”
“덥긴 한데... 안에 수영복을 안 입어서요.”
소재가 얇으니 소매가 길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건, 호주의 태양을 얕본 나만의 착각이었다. 게다가 수영복도 챙겨 오지 않았으니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해변가에 앉아 있을 수밖에. 하지만 솔직히 말해, 수영복을 챙겨 왔더라도 앤디처럼 시원하게 몸을 드러낼 자신이 없었다. 태양 빛에 피부가 탈 까봐서가 아니라, 불룩한 아랫배가 드러나는 내 몸매가 부끄러워 서였다. 이런 내 마음도 모른 채 앤디는 비키니의 끈을 푸르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게 상의를 벗어던졌다. 순간 당황스러워 잠시 시선을 어디 둘지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행동은 전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곳에서라면 그런 모습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였다.
“이 해변에서 토플리스(Topless)가 되나요?”
“안 돼요, 그래서 이렇게 엎드려서 볕만 쬐려고요.”
나의 질문에 그녀는 한 손으로 살짝 가슴을 가린 채 비치 타월 위로 엎드렸다. 그리곤 그녀를 향해 내리쬐는 태양의 기운과 청량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세상을 마음껏 품은 자유로운 사람처럼 보였다. 그 옆엔 긴 옷을 꾸역꾸역 껴입고 있는 나는 마치 그녀가 벗어던진 옷더미 중 하나로 보였을 테고.
며칠 후, 다시 찾은 해변. 이번엔 나도 조금 용기를 내봤다. 앤디처럼 대담하진 않았지만, 해변 패션에 적합한 수영복을 입고 나왔다. 앤디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같이 사진 찍을래요?”
앤디의 제안에 나는 그녀 옆에 서서 포즈를 취했다. 하지만 오늘도 불룩한 아랫배가 신경 쓰여 잔뜩 배에 잔뜩 힘을 주고 서 있었다. 반면 앤디는 그저 바람을 즐기듯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멋짐은 완벽한 몸매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당당함에서 나오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도 배에 힘을 풀고 태양을 있는 그대로 맞아보기로 했다. 그날은 나도 앤디 못지않은 해변의 여인이었다. 문제는 초콜릿빛 피부가 아닌 ‘갓 쪄낸 랍스터’가 돼버렸다는 것. 그날 저녁, 약한 화상을 입어 화끈거리는 어깨에 진정 젤을 발라주며 나는 결심했다. 다음부터는 자유도, 태닝도, 선크림과 함께 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