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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현 Jul 29. 2022

태어나서 처음으로 - 18. 시간과 대화를 먹는 끼니

23살, 난생처음 홀로 떠난 교환학생

나는 좋아하던 음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몇 숟가락을 뜨고는 이내 그만 먹겠다며 숟가락을 내려놓는 그런 사람, 그리고 한 30분 뒤, 군것질을 입에 넣고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어머니가 정성을 들여 끓은 찌개에도 몇 숟갈, 그리고 끝이었다. 언젠가 갔던 라멘 집에서는 사장님이 음식이 입에 안 맞냐며 가게 밖까지 나오셔서 사이다를 챙겨주셨다. 손사래를 치며 절대 아니라고 답했다. 정말이었다. 그냥 음식을 한 번에 많이 몸에 욱여넣는 게 익숙지 않을 뿐.

사실 밥을 먹는 것 자체보다, 식사를 매개로 사람들의 생각을 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 사람의 취향, 최근의 일상, 그 안에서 피어나는 소중한 생각들 그런 것들이 오가는 식사시간을 좋아했다. 늘 반듯한 얘기만 오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뭔가 재미를 느끼고 사랑이 오가는. 같은 것을 먹는 우리가 언젠가는 정말 같은 것으로 이뤄지고 말 것이라는 그런 망상까지 도달할 수 있는 식탁을 사랑했다.





미국에서는 그런 시간의 개념이 참 적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밖에서 따로 만나는 것이 아니면 다들 다른 시간에 밥을 먹었다. '밥을 먹었다'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토스터기에 굽기도 귀찮아서 그냥 그대로 꺼내 먹는 식빵 한쪽, 버블티, 가끔은 그냥 lay's 치즈맛 감자칩, 이런 것들이 식사였다. 시간대 별로 정해져 있는 식사들의 이름은 무엇보다 사치스럽고 무용한 단어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은 삶에 별로 없으니까. 나보다도 바쁜 룸메이트들은 더더욱. 이른 아침 수업을 가기 전에 식빵을 꺼내 입에 물고 무대 제작을 하러 뛰어간다. 실습이 끝나고 나면 11시. 애매한 시간이다. 버블티를 하나 사서 쪽- 빨아먹으며 다음 수업을 간다. 2시에 수업이 끝나면 이제 인턴 일을 하려 사무실로. 배가 고파서 사무실 책상에 비치된 크래커를 커피와 주워 먹고 나서는, 집에서 룸메들과 맥주에 감자칩을 먹으면서 영화를 본다.

하루는 마무리되었고 꽉 차 있었지만, 무언가 허기지다. 어딘가 건강하지 않은 것 같고, 내가 나의 삶을 잘 지탱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배가 부른데, 허기지다. 어쩌면 애정이, 어쩌면 영양소가.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정연, 주희와 코로나도 섬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일이 없는 날. 수업이 끝나고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캘리포니아 산 와인과, 바질 페스토 피자와, 치즈가 많은 라자냐가 우리의 식사였다. 처음 코로나도 섬에 갔을 때 유명한 호텔을 구경하고, 해피 아워 맥주를 마셔대던 그날 밤이 좋아서 오늘도 선택한 식사였다. 이 날 저녁도 그날처럼 잔잔한 곳에 우리만 깔깔대는 밤이었다.


묘한 균형이 많던 곳이었다. 공기에 아직 한낮의 온기가 많이 남아있었지만, 바람은 선선했다. 늘 익숙한 정연 언니와, 처음 만나는 주희도 중간의 나를 만나게 했다. 시간도, 위치도 중간 어드메에 있던 저녁에서 어쩐지 나를 발견했다. 어딘가에 늘 끼어 있는 나. 지금은 서울의 나와 캘리포니아에 즐겁던 나 사이에 있다. 캘리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한국에서의 마음가짐이 조금 섞여 들어간 나는 분명히 이전과 다르지만, 또한 같다. 밥을 먹으면서도 이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나라는 중간적인 것에 대해. 오늘은 정말로, 밥 보다도 시간과 대화를 먹는 '끼니'가 있던 밤이다.






코로나도 섬의 야경은 내가 샌디에이고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들 중 하나다. 야경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서울에서의 야경은 늘 슬펐는데, 여기는 아름답다. 이들의 아픔을 몰라서, 여기서 난 늘 행복했어서 그럴 것이다. 내가 느낀 즐거움을 이 사람들에게 투영하게 되니, 그냥 불빛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수면에 반사되는 빛깔을 느끼고, 돌멩이를 던져 흔들리는 색을 보고, 한 칸 한 칸이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 생일지 가늠한다. 그 속엔 이곳에 대한 나의 찬란한 기억들이 있다.

 


6개월, 사실 지내다 보면 그렇게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난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기억들을 얻을 수 있었는가 생각해 본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일 것이다. 룸메이트들과 실없는 농담을 하며 깔깔 웃던 추억, 외국인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꽤나 깊은 얘기를 하던 기억, 같이 교환 온 사람들과 가족같이 서로를 챙기던 순간. 그 모든 시간들 안에는 사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저, 좋은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LA에 있다고 해서, 늘 행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와 있느냐'는 행복의 질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 누군가와 서로 아끼고, 걱정하고, 좋아하고, 응원하는 순간들이 예쁜 것인데 가끔은 그걸 까먹게 된다. 그저 그 상황이 완벽했던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잊는다.





그래서 늘 나에게 소중한 시간들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에게 또 못 전할 말이 떠오른다. 부끄러워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그 말은, 대신 마음에 애정으로 맴돈다. 난 말하지 못하는 그 마음을 꽁꽁 묶어, 애정 블록을 만드는 것 같다. 마음에 무거운 애정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무거워서 말해버리고 싶어도, 간지러운 말들에 취약한 나는 또 입을 닫아버린다. 나의 마음을 알아주겠거니-. 그렇게 쌓인 육중한 블록들로 나라는 사람 안에 사랑의 기반을 만들 수 있다. 그걸로 하여금 난 더 많은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의 입에 맴돌지 않아도, 누군가의 마음에는 애정 블록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려 한다. 받은 사랑은 이유 없이 사랑을 베풀고 싶게 한다. 그래서 내 인생에서 좋은 사람들은 더 많은 좋음을 수용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런 투명하고 반짝이는 붉은빛의 경험은 조금씩 쌓여, 나는 애정과 사랑의 건물을 지어간다. 그 점에서 그들은 더욱 소중해진다.




나의 6개월은 이런 내면의 기반과 건물을 지을 수 있던 시간이었다. 완전히 다른 문화 속의 사람들에게서 받은 이유 없는 사랑은, 내가 그냥 좋아하는 것들을 그저 좋아할 수 있게 하는 준비를 도왔다. 과분한 애정 속에서 숨 쉴 틈 없이 무거운 마음을 지니고 다녔다. 웃음이 나는 무거움, 애정의 책임. 인생에서 별로 길지 않은 시간, 어쩌면 인생에서 중요한 마음을 배웠다는 걸 예감해서 6개월이 더 좋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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