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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현 Jul 28. 2022

태어나서 처음으로 - 17.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

23살, 난생처음 홀로 떠난 교환학생

https://youtu.be/YfIxML1SoZg

오늘의 영상


세상을 뒤집어 놓은 전염병으로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1년이나 밀렸음에도 교환을 가기로 결심하던 때를 기억한다. 나는 그때 정신이 없었고, 뭘 해야할 지 몰랐고, 겁이 났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4학년이랬다. 곧 사회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사회에서는 무얼 하며 먹고 살지 슬슬 정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건 쥐뿔도 없었다. 그냥 하라는 대로 공부하고. 하지 말라는 선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놀았었다. 그렇게 23살이 된거였다. 근데 나보고 사회로 나가라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하도 단호하고 당연하게 그런 말을 하길래, 어느 순간엔 내가 나갈 준비가 된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궁금해 했다. '사람들이 왜 당연히 내가 사회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왜 다들 그렇게 당연시하냐 이 말이다. 내가 사회를 나가는게, 왜 당연하지? 나 같은 애가 사회로 나가도 되나? 아무 울타리도 없어서 이 몸뚱이로 전사처럼 어른들을 마주하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나? 나같은 애가 사회로 나가도 대한민국이 유지가 되는건가?


그리고 곧, 세상이 소꿉놀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캐릭터를 키우고, 아이템을 장착해서 역할을 수행하는 게임 같아 보였다. 그래서 어느정도 큰 나는 아이템을 장착해야 했었다. 의사 소꿉놀이를 하려면 청진기가 있어야하는 것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스펙이라는 아이템들이 필요했다. 그렇게 보니 만만했다.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둥실- 떠올랐다. 카페 앞에 지나가는 수 많은 사람들을 봤다. 마스크를 쓰고 아메리카노를 들고 어딘가 바쁘게 총총, 걸어가는 그들. 마스크를 썼지만 뭔가 입 모양이 보이는 것 같은 그런 그들.


'내가 저들 중 일부가 될 준비가 되었는가?'

패닉이었다. 당연히 아니니까. 친구들끼리 장난으로 하는 말처럼, 난 말하는 감자였다. 말이라도 할 줄 아니 감자보다 조금 낫지만, 그렇다고 말을 잘하지는 않는 그런.

이 시간을 잡아야 했다. 흘러가는 시간의 바짓단을 붙잡고 엉엉 울고 싶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난 아직 멀었다고. 그치만 너가 나에게 한 번만 기회를 더 준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새사람이 되어보겠노라고, 아주 구차하게 매달리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을 멈추는 것 같은 방법을 찾았다. 좋은 기회가 있었다. 교환학생. 합법적으로 조금 쉴 수 있는 곳. 조금 생각할 수 있는 지역을 골랐다. 바다가 가까운 학교로.


난 그렇게 샌디에이고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샌디에이고의 파란 바다와 그 보다 더 푸른 바다에서 나는 조금 고민했다. 미래의 나를 준비하기 위해 난 여기서 뭘 해야할까, 뭘 연습해야할까. 돌아가면 난 마지막 학기를 다녀야 할 텐데, 그 때 준비가 되어 있으려면 여기서 어떤 경험을 해야할까. 질문들이 계속 연결되고 줄어들질 않아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답은 없고 질문만 있으니 더더욱.


오늘은 진짜 공부를 열심히 하겠노라고 결심한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날씨는 완벽했다. 룸메이트들은 학교의 잔디밭에 갈 건데 같이 가겠냐고 물었다. 조금 고민했다. 오늘의 결심이 작심세시간이 될 판이었으니까.

"가서 뭐할거야?" 내가 물었다.

룸메이트들은 답은 안하고 살짝 갸우뚱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물었다.

"너 뭐 할거야?"

'너는 가서 무엇을 할 계획이니'라는 의미의 질문이 아니라, '너 설마 가서 뭔가 할거야?' 하는 느낌이었다.

다들 계획이 없다고 했다.


"꼭 할 게 있진 않아. 그냥 있어도 되잖아, 그치?"


조금 당황했지만 얼른 대답했다.  

"... 그치!"


그래서 난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나왔다. 내 룸메이트들도 그랬다. 나무 밑 적당한 곳을 골라 잡고는 모여 누웠다. 4명이 반듯이 누워 하늘을 봤다. 한 명은 이내 잠이 들었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세명은 그냥 하늘을 봤다. 하얀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 나뭇잎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습, 햇빛이 비춰 달라지는 나무의 색까지. 주변에 몇몇 학생들이 멀리서 시끄럽게 웃어댔고 새들은 짹짹 거렸다. 멍하니, 그렇게 있었다.


이렇게 있던 적이 얼마만인가, 했다. '무엇을 할 지 고민할 시간에 무엇이라도 하자'라는 파워 한국인다운 신조로 살아왔던 나에게는 정말 생애 처음인 것 같았다. 적어도 내 의식이 있은 후로는 처음이다. 룸메이트에게 물었다.

"너네는 이런 거 자주 해?"

룸메이트는 그렇다고 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 그게 뭐든 - 더 명확해 지는 것 같다고. 아무것도 안하면, 다음에 할 일을 더 잘 할 수 있다고 했다.

오, 그거 좋은데? 싶었다. 조금 더 하늘을 봤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한 가지는 좀 알 것 같았다.

나는 아무 것도 안해도 되고, 어떤 것이든 해도 된다고.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떤 것이든 해도 되니까 재미있는 어떤 것을 찾고 싶었다.

"아, 너네가 말한게 이거였구나"

룸메이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웃으며 답했다.

"준비 된 것 같아?"

"응."

우리는 뛰어가서 아사이 볼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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