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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현 Jun 25. 2022

태어나서 처음으로 - 9. 나의 장소에 당신의 등장

23살, 난생처음 홀로 떠난 교환학생

https://youtu.be/CYcYxFXejfE

오늘의 영상





1. 써머랑 만나기

“LA에 온다구?” 믿을 수 없어 반문했던 말이었다. 서울에서, 그것도 강남이라는 회색 빛 도시에서만 보던 사람을 여기서 볼 수 있다니! 시험 기간에 과제를 미리 해 두겠다는 야무진 결심을 하면서 그녀를 반길 생각을 하는 나였다.

그렇지만 LA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전 날 새벽까지 에세이를 미리 작성하는 바람에, 늦잠을 잤다. 버스를 타려던 계획을 지워버리고 바로 택시를 불렀다. 택시 기사님은 평소에 만났으면 좋았을 것 같았지만, 그 날 좋다고 느끼기에는 너무 느린 사람이었다. 사실 여유로운 것이겠지만 급한 나 앞에서는 여유도 무색해지니까.

버스를 타러 가는 길, 최근 열심히 운동한 게 무색하게 뛰는 것도 힘들었다. 다행히 뛰는 도중, 짐칸을 닫으려는 기사님과 눈이 마주쳤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버스에 타서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었다. 요즘 Torry Kelly의 25th, 태연의 겨울나무, Ariana grande의 겨울 앨범을 들었다. 무언가 지나가는 헛헛한 마음과, 새로운 시작을 마주하는 신선한 마음이 섞여가는 것 같았다. 빨간 마음과 초록 생각이 회오리치는 모습을 상상하며, 푹 쉬었다. 생각보다 안개가 많이 낀 도로 모습에 걱정도 들었다. 어떤 연유로 써머가 LA에 왔는지 몰랐는데도, 위로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끼는 사람들이 많은 그 회색 건물과 이별하는 것이 얼마나 아쉬운 일인지, 아직 기억하고 있어서인가. 나와 이름도, 취향도 비슷한 그녀가 느꼈을 슬픔도 꽤나 비슷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할리우드 중앙에서 내렸다. 저번 달 보다 많아진 관광객에 활기를 띈 도로였다. 저번의 내가 겪은 일이 악몽이었던 것이라고 위안하며 지하철에 올랐다. 혼자 탄 LA 지하철은 위안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무서워서 가방 끈을 꼭 쥐고 911을 누른 채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이런 곳에서도 사람들이 일상을 영위한다니.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나한테서도 사라질 수 있을까?

대상 없는 두려움이 나를 잡아먹기 전에 정신을 다잡아야 하는데-, 라는 생각에 도달하는 순간 내릴 때가 되었다.

5분 정도 걸어가면, 우리가 묵을 숙소가 나왔다. 로비에 써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과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헤어진 시점의 날씨와 캘리포니아가 비슷해서 그런가, 입고 있던 옷도 늘상 보던 그 옷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반갑고, 기쁘고, 조금은 어색한- 또 다른 회오리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2. 베니스 비치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선셋을 보려고 했는데, 그리피스 천문대가 닫았다. 목적지를 잃은 우리는 베니스 비치라는 새로운 목적지를 만들었다.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 LA에서의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기념품을 사고 나오니, 어느 새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해를 붙잡으려는 듯, 바다 쪽으로 뛰어 갔다. 그런 마음을 외면하는 듯 빠르게 지고 있는 해를 바라봤다. 수평선 아래에 누군가 당기고 있는 것처럼 사라졌다. 원망했다. 해가 지고 나니 하늘이 더욱 분홍 빛을 띄었다. 보라색과 분홍색이 섞여가며 남색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또 다시 라라랜드를 떠올리며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위로 한참을 걸었다.


저녁에 맥주를 마시면서는 회사 이야기를 잠시 했다. 내가 떠난 이후로 변한 회사에 대한 내용은 처음 들었다. 써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상도 안되는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그 회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지워낼 수 있는 소식들이었다.

아껴주고, 아끼던 사람들의 상실이 있는 회사는 이제 정말 그저 회색 건물로 인식될 뿐이었다. 돌아가도 볼 수 없다는 것은 꽤나 쓰린 감정을 남겨주었다. 내가 그렇게 느끼니, 써머도 그랬을 것이라 마음대로 추측했다. 쌀쌀한 날씨와, 차가운 맥주와, 따뜻한 수프가 있었다. 우리도 상실한 것들과, 삭막한 도시와, 서로가 있었을 뿐이다.



3. 조슈아트리 국립공원 : 별, 불티, 사람

화요일에는 이번 여행의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조슈아트리 국립공원 투어가 있었다. 내가 LA로 출발하기 전 날 밤, 갑자기 예약한 투어였다. 다른 여행객들과 함께 패키지 투어로 가는 것이라 별 기대가 없었다. 신기하니 한 번 가 보자-, 정도? 아침에 급하게 준비를 하고, 가이드님의 차를 탔다. 다른 투어 참여자분들도 차를 채우고, 여행을 출발했다. 가면서 서로 통성명도 하고, 어떻게 여행을 오게 되었는지 얘기를 하면서 icebreaking을 했다. 또래인지라 서로 세우던 경계도 금방 내리고, 함께 여행할 수 있었다. 도착을 해서는 가이드님이 준비해 주신 바비큐를 먹었다. 한국에서도 이런 정성의 야외 식사는 처음이라, 와아- 하고 소리지르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우리는 놀게 하고 가이드님 혼자 준비하시는 모습이, 헌신적인 아버지 같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ㅎㅎ)


점심을 먹으면서 같이 여행 오신 분들과 더 친해진 것 같다. 하지만 파이널은 바로 저녁! 캠핑장에 가서 불을 피웠다. (물론 가이드님께서,,,)

불을 보면서 멍하니 있었다. 멍하게 뇌를 비우는 시간을 아까워하는지라, 평소에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 편인데 이 날은 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과 별만 있었다. 내가 생각할 것은, 그것들의 신선함과 아름다움 뿐이었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가장 부담 없이 즐기면 되는 시간이었다.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면서 불티가 날아올랐다. 하늘로 솟아 날아가는 불티를 보다가,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별에 눈길이 닿게 된다. 그래서 마치 불티가 별이 되는 것 같다는 어이없는 생각도 했다. 몇 개의 별이 뜬 상태였는데도, 나는 왜인지 불티에 마음이 사로잡혔었다. 날아가는 불씨들에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쉽게 사라지는 것이라서 그런가- 싶었다. 역시 나는 약하고 쓸모 없지만 아름다운 것들에 마음을 뺏기는 경향이 있다.

무용한 아름다움. 무용해서 사치스럽고, 아름다워서 안쓰러운 것들이 원래 인간을 현혹하는지라, 그 밤에도 한참을 그것을 보고 있었다. 곧 사라질 것을 알기에 더 공허한 아름다움으로 느껴졌다. 꺼지기 직전, 붉은 불빛을 내는 그것들이 나 같아서. 나 여기 있어요-, 작은 빛이라도 내 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스러지는 것 같아서. 위로 한 뼘 내딛으며 타닥- 하는 기합을 내는 불씨는 별 만큼이나 인상 깊었다.


본격적으로 별이 뜰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날은 구름이 너무 많아서 그 별들이 보이지 않았다. 몇 개 뜬 별을 보면서 호들갑을 떠는 우리들에게 가이드님은, 원래 100배는 더 많은 별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맑은 날, UCSD 운동장에서 본 별 정도의 수였다. 아쉬운 마음에, 구름에 대고 저리 가라고 소리쳤다. 마음대로 안되는 일에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못된 6살배기처럼. 근데 놀랍게도,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구름이 걷혔다. 은하수 같은 별들이 모두 보였다. 셀 수 없다는 건 이런 말이구나- 싶었다. 아름답다는 말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과학 교과서에서 들은 하늘이 둥글다는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지평선이 있고, 그 중앙에 우리가 서 있으며, 그 주변을 동그랗게 별들이 감싸주는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없고, 엄청난 거리가 있음에도 어쩐지 보호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별들의 엄청난 수에 압도된 우리에게, 위험은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다. 별똥별을 보면서는 소원을 빌었고, 별이 하나 둘씩 떠오를 때는 탄성을 질렀다.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핸드폰도 안되는 곳이라 그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닿을 수는 없었지만 뇌리에서 지우진 않았다. 미국에 와서 더 느끼는 고마운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별을 봤다. 반짝이는 별들이 그들처럼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간간히 빛을 내고 있는 우리. 매일 빛을 내고 있지만, 아주 어둡고 매우 조용한 곳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 우리의 빛. 그래서인가, 늘 나의 빛이 발현되고 있는 것인지 물음표를 달고 사는 우리.

아름답고 안쓰러운 것들은 별과 불티 뿐 만이 아니다. 파도의 물결도, 노을도, 햇빛에 반짝이는 야자수 잎도 그렇다. 늘 그런 것들을 보면, 그들을 닮은 우리들을 떠올린다. ‘우리’ 덕에 그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들이 풍성해진다. ‘우리’를 더 사랑해야지. ‘그들’이 늘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반짝이듯이.

별이 연극을 하 듯 다시 구름 뒤로 숨었다. 커튼콜 같았다. 공연이 끝난 뒤 아쉬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이었다. 더 보고 싶은데.

써머와 어깨동무를 하듯 안았다.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 같이 헤쳐 온 사람, 같은 아름다움을 느낀 사람이었다. 유난한 유대였다. 같은 과도기에 있는 우리가, 오늘 별을 볼 수 있던 것처럼 모든 것을 할 수 있길 바랐다. 핑크 빛의 노을과 별은 원래 함께 볼 수 없다고 한다. 핑크 빛 노을을 위해서는 필요한 구름이, 별을 보려면 사라져야 하니까. 부디 오늘 같은 운이 계속되길, 욕심쟁이 같은 소원도 빌었다. 아무 말없이 어깨동무만 있었던 것은, 또 따스한 말에 인색한 습관 때문이다.

오늘 하루를 함께 한 사람들과 서로 감사를 표했다. 내년 9월이나 10월, 날이 좋은 시점에 다시 오기로 했다. 그 날에는 익숙하고 새로운 반가움과 다시 함께하길 바란다. 사람과 추억을 얻은 날이라 마음이 충만하다. 이런 감정이 유일한 날이 아니기를 또 바란다.



4. 베버리 힐즈 208 restaurant:

우리가 갔던 곳 중에 가장 예쁜 식당은 아마 이 곳이 아닐까?

베버리 힐즈를 지나가면 유난히 예쁜 곳이 있는데, 그 거리가 바로 Rodeo Drive다. 그리고 그 거리에 앉아서 식사할 수 있는 곳이 208 restaurant이다.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오너먼트와 캐롤, 유럽식 건물 사이에서 식사를 하고 있으면, 누구보다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곳이다.


그 곳에서 써머와 식사를 하기로 했다. 힘들고 배가 고파서 잠시 아무데서나 먹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그 날은 기억에 남는 곳에서 식사를 하고 싶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은 많은 것들 중, 유일하게 계획대로 할 수 있는 것이어서 객기를 부린 것 같기도 하다. (힘든 데도 같이 가준 써머 고마워!)

도착하고, 메뉴를 골랐다. 우리 테이블을 담당하는 언니의 제안에 넘어가서 최초의 계획과는 달라졌다. 장소는 계획대로였으니, 이 정도는 기분 좋은 유동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와인이 먼저 나오고, 주문한 메뉴가 하나씩 나왔다.

써머가 교환에 와서 힘든 건 없었냐고 물었다. 별로 힘들다고 생각은 안했었는데, 그 한 마디 물음에 속사포처럼 내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누가 물어봐 주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힘든 것을 잘 말하는 성격은 아닌데, 와인 탓인지, 써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던 건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미국에 처음 와서 느꼈던 외로움, 적응하면서 느낀 향수를 나눴다. 써머도 느꼈을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괜한 공감을 바랐던 것 같다. 그렇게 어떤 힘겨움을 나누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감정에 다다랐다. 어떤 재능을 갖고 태어난 것인지, 나의 천직은 무엇인지. 매일 질문하지만, 아직도 모르겠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하고, 그것이 왜 가능한지, 불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나이’라는 것이 우리를 어떻게 속박하고 있는지 등이 우리의 안주였다. 현재에 대한 심란함과 미래에 대한 복잡함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어려운지라, 우리의 대화에도 아직 결론은 없었다. 그저 둘 다 물음표를 떠올리는 것뿐 아니라, 어쩌면 물음표 속에서 표류하고 있음을 서로 확인했을 뿐이다. 회사에서 같은 고통과 즐거움을 겪던 우리가, 같은 고민에도 잠식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 둘을 더 연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서 나의 모습이 보였다. 어서 빨리 이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우리 모두에게 오기를 바랐다. 와인을 먹어 따뜻하게 변한 내 볼 만큼이나, 마음도 응원으로 가득 차 따뜻했다. 피곤하고 쌀쌀한 날씨였지만, 따뜻한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 느낀 저녁이었다.


P.S.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회사라는 지극히 정 없는 곳에서 이런 사람을 얻다니! 그녀는 나보다 강하고 멋진 사람이므로, 분명히 잘 헤쳐 나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얘기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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