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의 공식적인 등교시간은 8시 30분에서 8시 50분이다. 8시 50분부터 9시까지 10분 동안은 자리에 앉아서 차분한 마음으로 9시에 시작되는 1교시를 준비한다. 하지만 8시 50분이 된다고 해서 교문을 걸어 잠그지 않기 때문에 여러 이유로 늦은 등교를 하는 아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초등 저학년 남자아이는 늦게 일어났는지 까치집 머리를 하고 책가방을 한쪽 어깨에만 걸친 채 실내화가방을 들고 겨우 집을 나선듯하다. 한 사람정도의 거리를 두고 옆에서 걸어가며 손자를 학교에 데려다주시던 할아버지의 손에는 담배 한 개비가 들려있다. 할아버지의 흡연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지만 아이의 간접흡연에는 관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꿈에서라도 아이의 엄마를 만나면 말해주고 싶다. '아이는 스스로 씩씩하게 등교를 잘할 거예요!'
아침에 출근하는 엄마는 아이를 깨워 밥을 먹이고, 솜씨를 발휘하여 아이의 머리를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예쁘게 땋아주었을 것이다. 엄마는 외출복을 골라놓고, 어머니가 오자 그제야 인사를 하고 바삐 출근을 했을 것이다. 손녀와 동행하는 할머니는 그날따라 아침부터 일이 바쁘셨는지 한 손에는 휴대전화를 들고 계속 통화를 하시며 얼굴 근육들이 한껏 성나있었다. 통화 중인 상대방에게 욕을 하시던 할머니는 갑자기 다섯 발자국 뒤에 오던 손녀에게 빨리 오라며 재촉하셨다. '아이는 엄마와 출근할 때 같이 나와서 돌봄 교실에 가면 어떨까요?'
8시 55분 즈음 한 엄마가 아이의 책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유모차를 끌고 있다. 유모차에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기가 타고 있었고, 손잡이에는 커다란 기저귀 한 팩과 실내화가방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초등 저학년 남자아이는 자신을 학교에 데려다주려는 엄마를 옆에서 필사적으로 말린다. 뛰듯이 걸으며 학교로 향하는 엄마를 향해 엄마의 몸과 유모차를 당기며 아니라고 애원하지만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다. "학교는 가야 하는 거야."
단호한 엄마의 걸음이 빨라지면서 학교에 다 와갈수록 아이는 더욱 진정하기 어려워지고 극도로 감정이 격해져만 갔다. 이 기세로만 가면 그래도 아이와 교문을 통과해 건물 앞까지 도착할 것이며 엄마는 아이가 어쩔 수 없이 교실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학교로 가는 아이의 뇌는 미디어에서 자극적인 영상만을 찾는 팝콘브레인을 이미 넘어서 보였다. 결국 학교에 들어선 아이와 엄마는 건물 앞에서 선생님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교실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엄마는 그제야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발길을 돌리며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그래도 학교는 가야 하는 거야."
울며불며 소리치는 아이를 독불장군처럼 학교로 데려다주려는 엄마를 모두가 외면했다. 그럴만한 일이 있겠지 싶어 그냥 지나쳐주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듯싶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뒤에 있을 때에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고, 옆을 지나칠 때에는 우는 게 특기라 안구에 눈물이 가득했다.
아이들이 기관에 가기 싫어할 때는 정말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늦게 일어나서 쉬고 싶을 수도 있고, 아침식사메뉴가 별로였을 수도 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경우 아기들은 조리 있게 설명하는 능력이 아직 부족하고, 양육자가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저 아이는 싫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날 기관에서의 경험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오늘 학교에서 예측되는 경험이 싫을 수도 있다. 학교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관계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말하지 않는 아이도 있을 테니 양육자가 알아내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교실로 들어가지 못한 아이를 데리고 한참을 달래면서 돌아 나오는 엄마를 단 2초라도 안아주고 싶었다. 아이보다 더 화가 나고 속상해도 실컷 울지도 못하는 엄마를 안아줘야 다시 그 힘으로 엄마가 아이를 안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살아야 아이도 살고, 엄마가 진정되면 아이를 존중할 수 있다.
아이들과 진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마음을 이야기하는 대상은 자신을 한 인격체로 존중한다고 여기는 사람일 것이다. 그 대상을 찾지 못한다면 누구에게도 진짜 마음을 열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는 것처럼 내 몸을 빌려 나온 완벽한 타인인 아이도 나와 동일시하지 않고 존중해야 한다.
아이의 돌봄을 조부모님께 부탁하며 일도 해야 하고, 살림도 해야 하며 아이도 키워내는 워킹맘과 워킹대디들을 안아주고 싶다. 노후를 즐길 나이에 또다시 육아의 전선에 뛰어든 조부모님들을 안아주고 싶다. 아이들과 제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이분들이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