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수액의 편안함에 길들여지지 않길 바라며

by 쥐방울

2022년도 서울대학교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을 위한 허준이교수의 축사 전문은 일 년이 지난 지금도 떠오를 만큼 당시 사회에 큰 화제로 기억된다. 필즈상 수상자이자 서울대 졸업생이면서 현재는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 겸 한국고등과학원 석좌교수인 그의 축사는 매우 솔직했고, 진짜 어른의 조언이었다.


허준이교수가 졸업생에게 가장 당부했던 것은 친절이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마주치는 여러 상황에서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길 바란다고 정확히 꼬집어 주었다. 그러니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라며 응원과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친절 말고도 축사 중에 뇌리에 박힌 문단은 하나 더 있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 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휴일이 없었던 고등학교에서는 대입준비, 대학에서는 취업준비, 직장 다니면서는 결혼준비, 부부에서 어느새 5인가족이 되며 육아 한가운데에서 처음 듣는 저 문장이 무서웠다. 고2를 시작으로 여전히 2년에 한 번씩 응급실 혹은 병원에서 수액 처방을 받았던 나는 무얼 위해 이리 산만해져 있는가 싶었다.



고열, 위경련, 만성피로 등 다양한 원인으로 병원을 찾았던 나는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내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연료경고등이 들어와서 겨우 휴게소로 주유를 하러 간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혹시 혈관을 잘 찾지 못해서 간호사가 여러 번 찌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면 지금은 싱글침대보다도 좁은 병원베드에 누울 때부터 이미 편안함을 느낀다. 자동차가 주유소에 들어설 때부터 안심되는 느낌이랄까.




코로나19의 의무격리도 해제된 어느 날, 초등 어린이에게 고열이 찾아왔다. 해열제를 복용하고 찾아간 병원에서는 검사결과 코로나도 독감도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오랜만에 찾아온 감기는 꽤 오랫동안 아이를 괴롭혔다. 편도가 붓고 코감기 증상이 있던 아이는 급성중이염으로 발전되었고, 의사로부터 수액 처방이 내려졌다.


입원경험이 전무한 만 8세 어린이는 수액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얼마 전 2살 아래의 남동생이 응급실에서 손등에 주사를 한 시간 넘게 맞았던 사연을 들었기 때문이다. 가볍게 코와 목, 귀를 진료받고 약국을 들러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어린이는 갑작스레 본인이 처한 현실에 오열하기 시작했다.


수액은 준비되어 있었고, 상황을 설명하며 기다렸다. 아이는 집에 가고 싶다며 결사반대를 했고 한 시간을 넘게 울었다. 처음 마주하는 낯선 상황에 겁이 많은 아이는 새로운 장벽에 일관성 있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호흡이 무척 가빠져서 대화조차 쉽지 않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요! 엉엉"


먹는 것 좋아하는 어린이에게 스테이크부터 달콤한 것까지 그 어떤 당근도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힘이 어마어마한 어린이를 성인 여럿이 모여 팔다리를 잡고 주사를 놓는다 한들 유년기의 트라우마로 남을까 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한 시간 반이 흘렀을까, 의료진에게 수액을 취소할 수 있는지 문의 후 우리는 아이의 바람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변함없이 수액 주사는 정말 싫다는 아이에게 욱신욱신한 마음으로 이런 눈빛을 보냈다.

'너도 수액이 가장 편안할 때가 올 수도 있어.'


분명 빨리 주사를 맞고 낫길 바라는 마음과 우느라 주사를 맞히지 못해 병원에서 민망했던 마음이 공존한 하루였는데 아이가 잠든 밤이 되자 마음이 바뀌었다.

'계속 쉬지 않고 달리다가 나처럼 수액 맞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느끼면 안 돼. 지금처럼 좋아하는 일 하며 다른 것에 산만해지지 말고 자라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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