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면서도 같은 센터에서 다른 강사분과 수업을 해보고픈 최종 결정을 드러내는 데에는 아무래도 좀 망설여졌다. 그런 순간에 센터에서는 오히려 아메리칸 마인드로 어떤 선택도 존중한다고 말씀해 주시며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이 역으로 다른 강사분을 제안해주기도 하셨다.
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뜻하는 FOMO가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전문가로 발전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분야인 운동까지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었다. 이미 개인의 몸과 마음, 가정, 육아, 일 등 대부분에서 하고 싶은 대로 눈치 보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강사와 새로운 레슨이 시작되는 첫날을 맞이했다. 그동안 재활스러운 필라테스를 하는 동안 강사의 큐잉에 맞춰 몸을 움직이지만 동작이 잘 수행되지 않거나 어지러움, 일시적인 근육 경련이 발생하면 항상 긍정에너지를 뿜어주시는데도 불구하고 내적 좌절감은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1년 차를 벗어났고, 더 이상 초심자가 아니다. 운동하는 목적도 아픈 곳을 해결하려는 것에서 벗어나 삶의 질을 높이려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나는 수십 번도 더 드러누웠던 새까만 리포머 위에 자리 잡았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 앞에서 배를 보이며 편안하게 안정된 상태를 취하는 것처럼.
해당 센터는 창시자인 Joseph Pilates가 만든 필라테스의 원형 그대로의 방식인 클래식 필라테스로 수업하는 곳이다. 클래식 필라테스는 큐잉이 과하지 않고 강사가 회원의 몸을 자세히 스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해진 운동 순서(FLOW)가 있었다.
리포머의 제일 첫 순서인 풋 워크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평소 알고 있던 키콘셉트를 떠올리면서 스프링을 늘렸다 줄이면서 호흡을 마시고 내쉬었다. 정수리와 발가락은 더욱 반대방향으로 뻗고, 척추는 매트로 앵커링 한 듯이 캐리지에 힘껏 눌렀다.
마치 군대에서 정해진 순서대로 짜인 훈련을 받는듯한 모습을 보시던 강사님은 같은 풋워크 시리즈에서 다른 큐잉을 하시며 색다른 느낌을 안겨주셨다. 골반을 전방 경사로 두고, 캐리지를 나갔다 들어오니 아주 안전한 스쾃(squat)의 느낌도 경험할 수 있었다.
"풋워크 시리즈는 골반을 후방 경사로 두고 허리를 바닥에 꼭 누른 채 해야 하는 게 아니었어요?"
같은 동작에 조금의 응용을 더하자 호기심에 질문이 쏟아졌고, 강사님은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황에서는 회원이 본인의 몸상태에 따라서 여러 가지 변형을 해보는 게 가능하다고 답변해 주셨다.
(플로우가 어느 정도 정해진 건 있지만)
정해진 건 없습니다.
정해진 운동순서가 있기에 회원으로서 처음 이를 숙지하는 것이 버겁기도 했지만 개인의 난이도에 따라 무리가 가는 동작은 뺄 수도 있었다. 또한 완성도가 높은 동작은 심화 단계로 나아가기 때문에 사실 한 번도 같은 수업이었던 적이 없고, 지루할 틈이 없는 것이 클래식 필라테스의 특징이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 상체를 임프린팅하며 동작하던 풋워크시리즈는 승모근이 긴장되어 있던 나에게 도움이 되었고, 누워서 하는 스쾃(squat)은 부상의 위험이 없으면서 허리와 하체 근육 대부분에 자극을 줄 수 있었다.
이어진 헌드레드와 숏스파인마사지 동작에서도 칼각이 생명인 군인모드로 시작해서 부드러움이 생명인 발레리나 모드로 마무리했다. 어느덧 말끔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는 곳곳에서 잔머리가 새순이 나듯이 튀어나와 있고, 복부와 허벅지는 내 것이 아닌 느낌이 들었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내 몸이 알려주었다. 곧 끝날 거라고.
50분 레슨이 종료되어 인사를 하려는데 필라테스 스탠스로 서있던 나에게 강사님의 큐잉은 갑작스레 끊이지 않았다.
"날개뼈를 모아서 아래로..."
"다리는 래핑, 복부는 스쿱~"
"손끝은 더 아래로!"
세상에 서있기만 하는데 땀이 이렇게 많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했다. 진짜 레슨이 마무리되고, 센터를 나서면서 항상 비상계단을 이용해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나가려는 나에게 마지막 인생 큐잉이 들려왔다.
"천천히, 우아하고, 여유있게"
비상계단을 평상시에 이용하지 않게 된 것은 그날부터였다. 육아하며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란다는 생각에 분주하게 움직이자 밤이 되면 언제 어디서 다친지도 모를 상처들을 발견하곤 했다. 아이들과 놀이터에 나갈 때는 엘리베이터에서 립밤을 바르며 1층부터 슬리퍼 신고 뛰는 내가 과연 우아한 모습으로 걸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