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라는 개념[1]은 1935년 영국의 식물학자인 아서 탠슬리(Arthur Tansley)가 학술지 <에콜로지(Ecology)>에서 처음 소개했다[2]. ‘에코(eco)[3]’는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가 어원이고, 시스템(system)은 체계이므로 직역하자면 ‘집의 체계’란 의미가 되겠다. 생태계는 특정 영역에 존재하는 유기체, 무생물 등 생태계 구성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는 총체적 체계를 말한다. 생태계는 특정 영역에 서식하는 유기체들을 중심으로 주위의 빛, 공기, 물, 흙 등 무생물 요소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생태계 내에서는 구성 요소들 간 상호 의존성과 상호 연결성에 기반한 물질의 순환과 에너지의 흐름이 발생한다.
우선 생태계 내에서 물질은 순환한다.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광합성을 하는 식물에 흡수되어 유기물로 합성되지만, 유기물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생물의 호흡을 통해 혹은 유기물로 구성된 생물의 사체가 분해되면서 공기 중으로 되돌아간다. 식물(생산자)은 동물(소비자)의 먹이가 되지만, 동물이 죽으면 미생물(분해자)에 의해 분해되어 식물이 생장하는데 필요한 무기물을 공급한다.
반면 에너지는 순환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흐른다. 태양에너지는 식물의 광합성을 통해 화학에너지로 변환되어 유기물 속에 저장되었다가 생물체의 생명 유지 활동에 쓰인다. 그리고 남는 에너지는 열에너지로 방출된다. 따라서 생태계가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태양에너지가 계속해서 공급되어야 한다.
(그림 2.3.1) 생태계 구성 요소와 상호작용
생태계는 인간의 삶에 유익한 다양한 혜택을 제공한다. 자원(식량, 물 등)의 공급, 극심한 기후의 조절, 영양분과 산소의 생산, 정서적 혜택(여가, 관광 등) 제공 등인데, 이를 ‘생태계 서비스(ecosystem service)’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태계 서비스는 물질의 순환과 에너지 흐름이라는 생태계의 기능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때에만 기대할 수 있다. 수질 오염, 산림 벌채 등 인간에 의한 교란 혹은 자연 발화에 의한 산불, 가뭄과 같은 자연적 교란은 생태계의 기능을 손상시켜 생태계 서비스의 질을 악화시킨다. 따라서 생태계의 안정성 유지가 인간의 삶,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동안의 연구는 생태계의 생물다양성이 생태계 기능의 안정적 유지 및 생태계 복원력[4]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어떤 생물종이 사라지거나 개체 수가 급감했을 때, 그 역할을 충분히 대신할 다른 종이 있을 경우, 생태계 기능은 크게 약화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야생 독수리 급감이 초래한 재앙적 결과
독수리는 썩은 고기를 먹는 자연의 청소부이다. 독수리는 병원균을 소멸시킬 정도로 위액의 산성이 강하고 면역체계가 발달해 썩은 고기를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다. 독수리는 방치된 동물 사체를 깨끗이 먹어 치움으로써 전염병의 확산을 억제해 인간의 삶과 경제 활동에 도움을 준다.
독수리는 인도에서 흔했지만 병든 소에게 ‘디클로페낙(diclofenac)’이라는 진통제를 광범위하게 투여하면서 5천만 마리 이상이었던 개체 수가 1990년대 중반 수천 마리로 급감했다*. 이 약이 투여된 소**의 사체를 먹은 독수리가 신장 이상을 일으켜 폐사했기 때문이다.
독수리 개체 수 감소로 대체 청소 동물인 들개와 설치류가 급증했지만, 이들이 독수리와 달리 사체를 깨끗이 처리하지 못해 악취, 오염 등의 문제가 심각해져 동물 사체 처리가 골칫거리가 되었다. 또한 들개와 설치류가 광견병, 페스트 같은 전염병을 옮기면서 2000~2005년 매년 1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연간 69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2006년 인도 정부는 이 약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독수리 개체 수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완전한 회복이 가능할지 의문이며 가능하더라도 수십 년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의도치 않은 인간의 행동이 생태계 균형을 파괴함으로써 ‘병원균 및 질병 확산 억제’라는 생태계 서비스가 제공되지 못해 나타난 결과였다.
* BBC(2024.7.26). How decline of Indian vultures led to 500,000 human deaths.
** 인도에는 전 세계 소 개체 수의 1/3인 3억 마리가 있다.
*** Eyal Frank and Anant Sudarshan(2022). The Social Costs of Keystone Species Collapse: Evidence From The Decline of Vultures in India. The Warwick Economics Research Paper Series (TWERPS) 1433. University of Warwick.
경영학에서 생태계의 개념은 1993년 경영전략 컨설턴트인 제임스 무어(James Moore)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기고한 논문[5]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그는 기업들은 “다양한 산업에 걸친 비즈니스 생태계(business ecosystem)의 일부”이며, “혁신적인 기업은 진공 상태에서 진화할 수 없고” 비즈니스 생태계 내에서 “신제품을 개발하고 고객 니즈를 충족시키며 궁극적으로는 다음 단계의 혁신을 위해 협력과 경쟁을 한다”라고 주장했다.
제임스 무어의 주장처럼 생태계는 기업에 적용하기 알맞은 개념이다. 창업~소멸의 생애 주기가 있고, 자신을 둘러싼 경쟁자, 소비자, 공급자는 물론 정책, 규제, 시장과 같은 환경 요소와 상호작용한다는 점에서 기업은 생태계 내의 유기체와 닮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영 전략, 기업(혹은 제품) 간 경쟁, 산업 육성 정책 등을 다룰 때 생태계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전체적인 관점에서 현상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진행됐던 가정용 VCR(Video Cassette Recorder) 표준 경쟁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1975년 소니가 베타맥스 방식의 VCR을, 1년 뒤 JVC(마쓰시타(현 파나소닉)의 자회사)가 VHS 방식의 VCR을 출시하면서 표준 경쟁이 시작되었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소니가 패배하였다. 이 사례는 우리에게 ‘사실상의 표준(de facto standard)’ 확보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소니의 패배 요인은 자사 기술에 대한 과신, 폐쇄적 부품 공급 정책, 마케팅 실패 등이었다는 시사점을 제시해 준다.
하지만 생태계 개념을 사용하면, 소니가 베타맥스 생태계의 주도자[6]로서 생태계 확장을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태계 간 경쟁에서 베타맥스가 패배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VCR 생태계는 VCR(기기) 생산자, 콘텐츠 공급자, 기기 대여자[7], 비디오테이프 대여자 등으로 구성되는데, 소니는 생태계 구성 요소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베타맥스 생태계가 확장될 수 없었다. JVC처럼 생산자 기반을 넓히고 기기 가격을 낮추기 위해 핵심 부품을 싸게 공급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콘텐츠를 확대하는 게 중요했지만[8] 영화 제작자들과의 협력에 미온적이었다. VHS 방식의 VCR 생산 기업이 많았고, VHS 방식의 콘텐츠가 많았으니 VHS 생태계가 계속 확장한 것은 자명했다.
그런데 당시 기업들, 특히 일본 전자 기업들은 필요한 핵심 부품을 내부에서 조달하는 수직적 사업 구조를 갖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하드-소프트’ 시너지 확보를 목적으로 할리우드 영화사까지 인수했다[9]. 영상 관련 사업에서 부품(CRT, 저장매체)-기기(TV, 영상재생기기)-콘텐츠(영화)의 수직적 구조를 완성한 것이다. 이처럼 자기 완결적 사업 구조를 중시하는 당시의 경영 풍토 하에서 수평적 협력 기반의 생태계 전략을 생각해 낸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기업들이 새로운 제품 혹은 서비스를 출시할 때마다 생태계 구축을 우선 고려한다. 기업들의 경영 전략도 시대에 따라 진화해 왔다.
생태계는 ‘특정 지역’의 유기체, 무생물 등 구성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는 체계이다. 따라서 생태계는 지역에 따라 달라지고 지역별로 유형화될 수 있다. 크게는 육상 생태계, 수상 생태계, 작게는 동네 숲 생태계, 연못 생태계 등 어떤 지역으로 한정하는가에 따라 생태계의 범위와 크기가 달라진다.
경영, 정책 등의 분야에서도 생태계를 다양하게 정의하고 분류할 수 있다. 자연 생태계와 다른 점은 지역이 아닌 구성 요소가 무엇이냐에 따라 생태계가 규정된다는 것이다. 구성 요소가 제품이면 ‘제품 생태계’, 기업일 경우에는 ‘기업 생태계’가 되는 식이다.
먼저 자연 생태계의 개념을 차용해서 제품 생태계에 대해 살펴보자. 흔히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애플 생태계에 들어갔다’라든지, ‘애플 생태계에서 탈출했다’라는 말을 쓰곤 한다. 그런데 다양한 애플 제품들 중에서 스마트폰 하나만 쓰면서 ‘애플 생태계에 들어갔다’고 하지는 않는다. 여러 종류의 애플 제품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연 생태계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면 ‘애플 생태계’는 제품 요소(애플의 스마트워치,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등)와 비제품 요소(애플리케이션 서비스, 규제, 정책 등)로 구성되어 있다.
제품들이 핵심 구성 요소인데, 이를 생태계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TV,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등 가전제품 일체를 특정 회사 제품들로 구매했다면, ‘특정 회사 생태계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답은 ‘구성 요소 간 상호 작용’, ‘구성 요소 간 상호 연결성’이라는 생태계의 개념에서 찾아야 한다. 구성 요소들이 상호 작용을 하지 않거나 서로 연결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생태계가 아니라 단순 집합이나 묶음에 불과하다. 애플 제품들 간에는 데이터를 주고받거나 제품들을 넘나들며 서비스를 끊김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즉 애플 제품들 간에는 상호 작용 혹은 상호 연결성이 있는 것이다. 반면, 특정 회사 가전제품들 간에는 이런 상호 연결이 아직까지는 없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여러 애플 제품들을 사용하면서 편리성, 유용성 등 효용 가치를 느끼지만, 특정 회사의 여러 가전제품들을 사용하면서는 이런 효용성을 느끼기 어렵다.
기업 생태계도 똑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업 생태계는 기업 요소와 비기업 요소로 구성된다. 기업 요소에는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스타트업[10] 등 다양한 유형[11]의 기업이 포함된다. 비기업 요소에는 기업을 둘러싼 수요 시장, 정책 및 규제, 노동 시장, 금융 환경 등 제반 경영 환경이 포함된다.
(그림 2.3.2) 기업 생태계의 구성 요소와 상호 작용
기업들은 생태계 내 다른 기업들과 경쟁 혹은 협력하거나 기업을 둘러싼 경영 환경에 대응한 전략을 수립해 추진함으로써 성장을 모색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모든 기업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생태계의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의 원리처럼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기업만이 성장한다. 성장에 실패한 기업들은 퇴보하다가 소멸하는데, 잔여 자산이나 인력은 청산, 재창업, 재취업 등을 통해 다른 기업으로 옮겨 간다. 자연 생태계에서 물질이 순환하는 것처럼 기업 생태계에서는 자산, 인력 등의 순환이 발생한다[12].
이러한 기업 생태계가 건강하게 잘 유지된다면 국가 경제에 활력이 넘치고 국민들의 생활 수준도 향상될 것이다. 기업 생태계가 건강하게 잘 유지된다는 것은 기업의 생태계 진입과 퇴출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건강한 기업 생태계는 스타트업 창업(생태계 진입)이 용이하고, 경쟁력이 뛰어난 기업은 계속해서 성장하며 그렇지 못한 기업은 자연스럽게 소멸(생태계 퇴출)되는 생태계를 의미한다. 반대로 스타트업 창업이 어렵고,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이 계속해서 존속하는 기업 생태계가 유지된다면 국가 경제는 활기를 잃고 정체의 늪에 빠질 것이다.
앞에서 자연 생태계의 기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생태계 복원력을 강화하는데 생물다양성 확보가 중요하다는 것을 살펴봤다. 기업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한두 대기업이 주도하는 기업 생태계는 주도 기업에 문제가 생길 경우, 기업 생태계 전반으로 문제가 확산되고 국가 경제에도 타격을 주게 된다.
핀란드가 대표적 사례이다. 핀란드 경제는 2000~2007년 동안 EU 회원국 중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구가했는데, 이는 노키아(Nokia) 한 기업에 힘입은 바가 컸다. 1865년 목재 가공 및 제지업으로 출발한 노키아는 고무 제품, 케이블, 전자 장비, TV 등의 분야로 사업 다각화를 추진했지만[13], 무분별한 확장에 따른 실적 부진이 이어지면서 1980년대 후반에는 회사 존립마저 위협받는 경영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1992년 CEO로 취임한 요르마 올릴라(Jorma Jaakko Ollila)[14]가 휴대폰과 네트워크 장비 사업에 집중하는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세계적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노키아는 1992년 세계 최초의 GSM 휴대폰을 출시하면서 디지털 휴대폰 시대[15]를 열었고, 1998년 모토로라를 제치고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에 올라선 후 2012년 1분기 삼성전자에 의해 2위로 밀려나기까지 14년 간 세계 휴대폰 시장의 맹주 자리를 지켰다. 노키아의 매출액은 세계 1위로 올라선 1998년 156억 달러에서 2007년 746억 달러(노키아 역사상 최대 매출[16])로 5배 증가했고, 세계 시장 점유율은 1998년 22.5%에서 2008년 38.6%(노키아의 시장 점유율 최고치[17])로 뛰어올랐다.
이러한 노키아의 고속 성장은 핀란드 GDP 및 수출에 바로 나타났다. 핀란드 GDP에서 노키아가 창출한 부가가치의 비율은 1995년 1%에서 2000년 4%로 네 배 증가한 후 2001~2007년 동안에는 2.9%~3.8% 수준을 유지하였다[18]. 핀란드 내 노키아 협력업체들이 창출한 부가가치까지 감안할 경우 노키아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창출된 부가가치의 비율은 이보다 훨씬 컸음이 자명하다. 또한 핀란드 수출에서 노키아가 차지하는 비율은 1990년대 초반 5% 미만에서 2000년대 초반에는 20% 수준으로 급증하였다. 이후 펄프, 기계류 등 다른 품목의 수출 증가로 노키아의 비율이 낮아지긴 했지만, 노키아는 2000년대 핀란드 수출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노키아는 정부 재정에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핀란드의 전체 법인세 수입에서 노키아의 비율은 1990년대 중반 5% 미만에서 2003년에는 23%까지 높아졌다.
하지만, 2007년 6월 애플의 첫 스마트폰인 ‘아이폰(iPhone)’이 출시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2008년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가 등장하고 스마트폰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노키아는 자체 심비안(Symbian) OS 개발을 강화했다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폰(Windows Phone)’ OS를 도입하는 등 우왕좌왕했다. 2008년 38.6%였던 노키아의 시장 점유율은 2012년 19.1%로 반토막이 났고, 매출액은 2008년 708억 달러에서 2012년 399억 달러로 급감했다. 결국 추세를 반전시키지 못한 노키아의 휴대폰 사업은 2013년 9월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되면서 노키아의 ‘휴대폰 신화’는 막을 내렸다.
자료: ETLA – 핀란드 경제연구소(Research Institute of the Finnish Economy)
(그림 2.3.3) 핀란드 GDP 및 수출에서 노키아가 차지하는 비율 추이
노키아가 이처럼 급격히 몰락하면서 핀란드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다. 2012년 이후 EU 경제가 재정 위기에서 벗어나 회복세를 보인 반면, 핀란드 경제는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등 침체에 빠졌다. 핀란드 경제는 2016년이 되어서야 EU 대비 높은 성장률로 복귀할 수 있었는데, 이는 노키아 퇴직자 및 젊은 세대 중심의 스타트업 창업 붐에 힘입은 바가 컸다.
자료: 세계은행(World Bank)
(그림 2.3.4) 2000년 이후 핀란드 경제성장률 추이
핀란드 사례는 기업 생태계의 다양성이 확보되지 않았을 때 국가 경제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핀란드는 인구가 550만 명에 불과해 기업 생태계의 다양성을 충분히 확보하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지만, 노키아 몰락 이후에 형성된 창업 문화가 이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면 ‘노키아 쇼크’의 강도와 기간을 어느 정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래 죽음이 살리는 해저 생태계
수십 톤, 많게는 백 톤이 넘는 고래가 죽으면 사체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데, 이를 ‘고래 낙하(Whale Fall)’라고 부른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고래 사체는 영양분이 부족한 해저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에게 풍부한 먹이와 영양분을 제공하고 남은 뼈는 안전한 서식처가 된다.
글로벌 대기업 노키아도 침몰 후에는 핀란드 창업 생태계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무엇보다도 만여 명에 달하는 노키아 출신 인력들이 창업 전선에 뛰어들면서 핀란드 창업 문화 확산에 기여하였다. 노키아는 2011년 4월부터 퇴직자들의 창업을 지원하는 ‘브릿지 프로그램(Nokia Bridge Program)’을 운영했는데, 이를 통해 천여 개의 스타트업이 창업되었다*.
* 강유덕(2016). 노키아의 변화를 통해 본 핀란드 경제의 구조변화. EU연구 43호, pp. 163-197.
자연 생태계를 구성하는 생물들의 생명은 유한하다. 따라서 생태계가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생물들의 세대교체가 원활히 이뤄져야 한다. 숲 속에 가보면 다 자란 나무들이 많지만 바람이나 벼락에 쓰러진 나무도 있고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어린 나무들도 있다. 세월이 흐르면 어린 나무들이 자라서 새로운 숲을 이룰 것이다. 이 같은 숲의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천연갱신(天然更新, natural regeneration)’이라고 한다. 천연갱신은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적응한 수종의 씨앗이나 맹아에서 시작되므로 생태적으로 안정된 숲을 이룰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에 인간이 인위적으로 파종하거나 묘목을 심어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새로운 숲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인공갱신(人工更新, artificial regeneration)이라고 한다.
기업 생태계도 마찬가지이다. 기업 생태계를 구성하는 기업들의 수명 역시 유한하기 때문에 기업 생태계의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업들이 계속 생겨나야 한다. 스타트업이 활발히 창업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타트업 창업이 자연적으로 활발히 일어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정부, 대학, 공공 연구소 등이 개입해서라도 스타트업 창업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스타트업은 기업 생태계의 차세대 주역이 되거나 혹은 다른 기업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기업 생태계의 건강과 활력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첫째, 많은 스타트업들이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을 성공적으로 지나 대기업 혹은 강소기업으로 발전할수록, 기업 생태계의 구성이 풍부하고 튼튼해진다. 이는 기업 생태계를 이끌어 갈 차세대 주자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며, 기업 생태계가 소수 특출한 기업의 명운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건강하게 계속 유지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 한국 여자 양궁 국가 대표팀은 단체전 10연패를 달성했다. 그만큼 한국 여자 양궁은 세계 최고이자 최강의 실력을 자랑한다. 그런데 3명의 선수가 출전하는 단체전에서 10연패를 달성하는 동안 대표 선수로 총 몇 명이 선발됐을까? 대표팀에 여러 번 선발된 선수도 있으니까 선발된 전체 선수는 30명이 채 안 될 것이다. 여자 양궁 국가대표팀의 올림픽 단체전 10연패 달성에 참여하고 기여한 대표 선수는 총 24명이었다. 3번 선발된 선수가 1명, 2번 선발된 선수는 4명, 나머지는 지금까지 딱 한 번만 선발됐다.
(표 2.3.1) 역대 올림픽 대한민국 양궁 여자 단체전 성적 및 선수
1996년, 2020년, 2024년에는 3명의 대표 선수가 모두 새로운 선수로 바뀌었는데도 우승을 놓치지 않았다. 특출한 선수 몇 명에 의존한 게 아니라, 매번 선발된 선수가 고루 뛰어났다는 뜻이다. 아마 몇 명 특출한 선수에 의존했다면 10연패 달성은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 여자 양궁은 실력 있는 새로운 선수들이 계속 성장해 두터운 선수층을 형성하면서 자연스레 세대교체가 이뤄졌기 때문에 40여 년 동안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기업 생태계에서도 기술 및 산업의 변화 트렌드에 맞춰 새로운 스타트업들이 계속 등장해 성장할수록 역동성과 활력이 높아진다. 미국이 첨단 산업에서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의 경우, 미국은 과거 대비 제조 경쟁력이 많이 약화되었지만 설계에 특화된 팹리스(Fabless) 반도체까지 포함하면 여전히 반도체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PC용 CPU(Central Processing Unit) 시장에서는 1968년 창업한 인텔이, 모바일 기기용 AP(Application Processor) 시장에서는 1985년 창업한 퀄컴이, 새롭게 주목받는 인공지능(AI) 칩 시장에서는 1993년 창업한 엔비디아가 강자로 부상해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PC → 스마트폰 → 인공지능 등으로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스타트업들이 계속 등장해 성장하면서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이라는 바통을 차례로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주: 시가총액은 연말 기준
(그림 2.3.5) 미국 반도체 3사의 시가총액 추이
둘째, 스타트업들은 기존 기업들과의 협업 등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 기업 생태계의 혁신 역량과 활력을 제고한다. 이는 자연 생태계의 생물종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상호 이익을 얻는 공생(共生, symbiosis)[19]과 같은 것이다. 공생은 생물종 간 경쟁과는 달리 공생 관계에 있는 각 생물종이 함께 번성할 수 있도록 하며, 각 생물종이 서로 연관되어 진화하는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촉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식물의 꽃과 꽃가루 매개 곤충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꽃은 수분이 더 잘 되도록, 곤충은 꿀을 더 많이 딸 수 있도록 진화해 왔다.
(그림 2.3.6) 자연 생태계의 생물종들 간 경쟁과 상리공생
기업 생태계에서도 스타트업과 기존 기업 간 협업은 양측이 갖고 있는 단점을 상호 보완하고 윈윈(win-win)할 수 있는 시너지를 창출함으로써 모든 참여 기업의 성장을 촉진하고 기업 생태계의 역량을 향상시킨다. 스타트업은 빠른 실행력, 높은 동기부여, 과감한 위험 감수 성향 등을 바탕으로 혁신적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구현하고, 기존 기업은 풍부한 시장 지식 및 시장 접근성, 인력, 자본력 등을 기반으로 상품화 및 시장 확산을 담당하는 식으로 협업한다면 혁신적 아이디어의 상용화 실패 위험이 낮아지고 구현된 제품의 시장 안착이 빨라질 것이다.
주: Prats, J., Amigó, P., Ametller, X. & Batlle, A.(2017). Corporate Venturing: Achieving Profitable Growth Through Startups. IESE.를 참고해 작성
(그림 2.3.6) 단점을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스타트업과 기존 기업 간 협업
이러한 스타트업과 기존 기업 간 협업은 의약품 산업 등 R&D 난이도가 높은 산업, 혹은 전통 산업에 디지털 기술(IT, 인공지능 등)이 접목되는 융합 분야[20]에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의약품 산업에서는 스타트업과 기존 기업 간 협업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고 있다. 의약품 산업에서는 기존 화학적 합성 방식의 신약 개발이 한계에 다다르면서[21] 바이오 신약 개발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안전성이나 부작용 등에 대한 기준이 엄격해지고 피험자 확보가 어려워지는 등 임상 시험 비용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기초 연구에서 신약 후보 물질 발굴까지는 스타트업이, 후보 물질로 혁신 신약을 개발하는 것은 기존 기업이 담당하는 형태의 역할 분담이 일반화되는 추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스타트업은 발굴 물질에 대한 기술료를 수취해 취약한 재무상태 개선 및 후속 연구에 집중할 수 있고, 기존 기업은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신약을 개발할 수 있어 상호 윈윈이 가능하다. 이처럼 기업 간 경계를 허무는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 개방형 혁신)’ 방식의 신약 개발은 신약 개발 과정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절감해 개발 생산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신약 개발 성공률도 독자적인 폐쇄형 개발 대비 세 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22].
< 참고 자료 >
[1] ‘생태계’라는 용어는 영국 식물학자 아서 클래펌(Arthur Clapham)이 아서 탠슬리의 요청을 받고 처음 만들었다.
[2] Tansley, AG (1935). The use and abuse of vegetational terms and concepts. Ecology, 16(3), 284–307.
[3] 경제를 뜻하는 영어 단어 ‘이코노미(economy)’는 그리스어로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와 관리를 뜻하는 ‘노니아(nomia)’를 합친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서 유래했다. 생태학을 뜻하는 ‘에콜로지(ecology)’는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와 학문을 의미하는 ‘로고스(logos)’를 결합해 만들어졌다.
[4] 교란이나 충격 때문에 생태계 기능이 훼손되더라도 이를 바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5] Moore, James F.(1993). Predators and prey: a new ecology of competition. Harvard Business review, May-June.
[6] 생태계에는 특정 지역 생태계를 대표하는 깃대종(flagship species), 생태계의 종 다양성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핵심종(keystone species)이라는 개념이 있다. 깃대종은 사라져도 생태계가 유지되지만, 핵심종이 사라지면 생태계 균형이 파괴된다. 지리산 반달가슴곰은 깃대종이지만, 알래스카 불곰은 핵심종이다. 불곰은 먹이 동물의 개체 수를 적정 수준으로 조절해 생태계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반달가슴곰은 지리산 생태계 복원의 상징과 같은 동물이다.
[7] 가정용 VCR 시장 초창기에는 기기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기기 대여 서비스도 유행했었다.
[8] 미국의 성인 영화가 VHS 방식으로만 제작된 것이 표준 경쟁에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도 있다.
[9] 1989년 소니가 ‘컬럼비아 픽처스’를, 1990년 마쓰시타(현 파나소닉)가 ‘MCA(현 유니버설 픽처스)’를 인수했다. 하지만 마쓰시타는 5년 후 MCA를 캐나다 주류업체 씨그램에게 매각했다.
[10] 엄밀히 말하자면(법률 상으로는) 스타트업은 중소기업에 포함되지만, 스타트업의 역할이 특별하므로 별도로 구분했다.
[11] 여기서는 기업의 크기를 기준으로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등으로 구분했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기업의 생산품을 기준으로 소재 기업, 부품 기업, 완제품 기업 등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12] 자연 생태계에서 에너지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태양에너지 → 생산자 → 1차 소비자 → 2차 소비자), 기업 생태계에서는 가치(value)가 고객 쪽으로 흐른다(소재 기업 → 부품 기업 → 완제품 기업 → 고객).
[13] 1980년 후반 노키아는 유럽 최대 TV 제조업체였고 스칸디나비아 반도 최대 컴퓨터 회사였다.
[14] 심각한 경영 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신임 CEO로 취임해 신속하고 과감한 구조개혁으로 노키아를 회생시킴으로써 ‘북유럽의 잭 웰치(Jack Welch, 전 GE 회장)’로 불렸다.
[15] 2세대(2G) 이동통신을 말한다. 모토로라가 주도했던 1G 이동통신은 아날로그 방식이었다.
[16] 2007년 노키아 매출액은 그해 핀란드 GDP 대비 29%에 달하는 규모이다.
[17] 가트너(Gartner) 발표 기준.
[18] ETLA – Research Institute of the Finnish Economy (2010). Nokia and Finland in a Sea of Change. https://www.etla.fi/wp-content/uploads/2012/09/B244.pdf.
[19] 일반적으로 공생은 쌍방이 이익을 얻는 상리공생(相利共生, mutualism)의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공생 관계는 누가 이익을 얻는가에 따라 4가지로 구분된다. 쌍방이 이익을 얻으면 상리공생(相利共生, mutualism), 한쪽만 이익을 얻고 다른 한쪽은 영향이 없다면 편리공생(片利共生, commensalism), 한쪽만 피해를 보고 다른 한쪽은 영향이 없다면 편해공생(片害共生, amensalism), 한쪽은 이익을 보는 반면 다른 한쪽은 피해를 본다면 기생(寄生, parasitism)이라 불린다.
[20] 스마트팜(Smart Farm, 농업 + 디지털), 스마트팩토리(Smart Factory, 공장 + 디지털), 에듀테크(EduTech, 교육 + 디지털), 핀테크(FinTech, 금융 + 디지털) 등.
[21] 합성의약품 출시가 급증하면서 합성 신약을 개발할 때 목표로 할 만한 적응증(目標 適應症)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22] 글로벌 회계법인 딜로이트(Deloitte)가 1998~2012년 동안 진행된 글로벌 신약 개발 프로젝트 281개의 성과를 분석한 결과, 개방형 혁신을 통한 신약 개발의 성공률(34%)은 독자적인 폐쇄형 개발의 성공률(11%)보다 세 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