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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유 Sep 24. 2024

[1]

8시 45분.

겨울 향기가 코 끝을 맴돌고 땅이 얼어붙기 시작하는 11월 저녁. 늦은 오후 한두 시간을 제외하고는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집에 익숙해졌다. 어두워지면 어두워진 대로, 밝으면 밝은 대로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가장 건강하고 편안한 삶이라 생각한다. 거실 창 밖으로 하나 둘 켜지며 어둠의 그림자를 벗겨내려는 불빛들은 세상의 순리에 발버둥 치는 것처럼 위태롭게 보인다. 이따금 깜박거리는 불빛은 나를 농락하는 것만 같다.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집에 불을 켜지 않는 것에 알 수 없는 도취감을 느낀다. 애쓰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산다는 것과 전기세도 아낀다는 것은 덤이다. 저 불빛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지만 잔잔하게 맺힌 눈물은 한 방울 떨어지는 게 고작이다. 주말이면 딸아이를 만나게 될 테니 많이 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촉촉해진 눈은 금세 어디론가 사라지고 바싹 말라 있다. 리고 내쉬는 한숨에 설움을 날려 보낸다.


지난주에 배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위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1주일치 약을 다 먹었지만 효과가 없던 차에 회사 선배에게 양배추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 마트에서 양배추를 하나 사 왔다. 배가 고픈 것 같으면서 쓰리기도 하고, 쥐어짜는 것 같으면서도 더부룩한 것 같은 통증은 묘한 기분 나쁨을 야기한다. 통증조차 나를 농락하는 느낌이다. 냉장고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김지통 하나가 전부다. 아마도 하얗게 곰팡이가 생겨났겠지. 비위가 약해 곰팡이가 피어있을 김치통을 열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전기밥솥 사용법은 잊어버렸고 매 끼니 부지런하게 만들어서 먹겠다는 호기로움은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다. 작년에 샀던 햅쌀은 그대로 묵은쌀이 되어버렸고 쌀가마 위에는 먼지가 내려앉았다. 북적거리던 집안 살림이 냄비 한 개와 숟가락 1개, 그릇 몇 개 만을 남기고 해가 넘어가듯 다 사라졌다.


배를 부여잡고 양배추를 손질하려고 칼을 집어 들었다. 아차, 도마 역시 사라지고 없다. 물로 슥슥 닦아낸 싱크대 위에 양배추를 올려놓고 적당히 잘라서 끓는 냄비에 넣어 기다린다. 불규칙한 식사, 외로움을 달래줄 달고 짠 안주에 소주와 막걸리를 마셔대며 찌들어 지낸 지 2년. 겨우 숨을 쉴 만큼의 별 볼일 없는 벌이에 틈만 나면 회사 동료들과 술을 먹어대고 집에서는 굶거나 패스트푸드로 대충 때우니 속이 정상일리가 없다. 통증은 농락이 아니라 살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머리로는 음식을 깨끗하게 만들어서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외로움이라는 녀석에게 잡아먹힌 지 오래. 외로움은 나에게 호화스러운 깨끗한 음식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요리를 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없다. 남아있는 양념은 간장 한통이 전부인데 그 조차도 언제 유통기한이 지났는지 알 수 없다. 언제부턴가 내가 먹을 음식을 스스로 만드는 것에 흥을 잃었다. 홀로 해결하는 식사는 순전히 배고픔을 없애고 에너지원을 공급하기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맛을 생각하고 느끼면서 먹기란 혼자에게는 버겁다.


나에게 호화스러움은 오직 주말에만 허락된다. 주말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삶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2년 전에 아내가 지방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청주에서 지내고 있다. 금요일 저녁이면 나는 퇴근 후 청주로 향한다. 차가 많이 막히는 시간이라서 3시간 이상 운전대를 잡고 있어야 한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을 위해서라면 10시간이라도 기꺼이 운전대를 잡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다시 외로움과의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막내아들로 태어나 온 가족의 사랑만 받으며 어리광에 익숙한 내가, 남편이자 아빠라는 존재가 되었을 때 느낀 것은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바위 같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속이 묵사발과 같이 흐물거려도 겉은 단단해야 한다. 그래야만 아내와 아이가 안정감을 느낀다. 아빠이자 남편이 짊어진 무게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외로움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외로움은 불편하고 힘든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그런 존재로.


익숙한 듯 어색한 외로움이라는 존재, 그리고 위염에 한층 가까워진 후에는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다. 해가 지면 어두컴컴한 집 안에서 할 것이라고는 희미해져 가는 빛에 의지해 책을 조금 더 보거나 이것저것 생각하는 일이다. 그리고 내면의 나를 향해 더 깊이 들어간다. 잘 지내고 있는지, 요즘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무엇에 관심이 가는지, 앞으로 남은 삶의 계획은 어떻게 세울 것인지 등으로 끝없이 스스로와 대화를 이어간다. 나에게 관심을 갖고 때때로 다독여주고 질타하는 대화는 잡념을 줄이고 삶의 기준을 더 단단하게 한다. 그리고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 이 시간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핸드폰은 언제나 무음이다. 저녁 시간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연락을 해 올 만한 사람이 없을뿐더러, 캄캄한 집에서 핸드폰 불빛은 쉽게 눈에 띈다. 외로움과 함께한 양배추 저녁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려는 찰나에 핸드폰에 불빛이 들어온다. 어색한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형의 친구다.


약 3~4년 전에 업무차 우연히 만나 연락처를 교환했던 기억이 난다. 형과 형의 친구들이 만든 축구 동호회에 몇 차례 가서 축구를 했기에 안면이 있었다. 그러다 업무 관계로 마주쳤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리고 연락처를 교환했지만 이후로는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전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형을 통해서 연락이 왔을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뒷골이 서늘해지며 내 온몸의 살갗을 날카로운 무언가가 난도질다. 과도한 긴장을 억누르고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형님은 내게 간단한 안부를 묻는다. 


"어, 동근이니? 밥은 먹었고? 다름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차분하지만 억누를 수 없는 무엇인가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불안함이 가득한 목소리다. 그 떨림은 얼마 가지 못하고 울분으로 바뀐 외마디가 내 귀에 닿는다. 


"희찬이가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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