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똥구리 Dec 25. 2023

난로를 피우며

[양촌일기] 수정처럼 빛나는 겨울

  겨울에도 주말이면 밭에 간다.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땅이 얼고 물이 얼어 딱히 할 일은 없다. 서울에 산지 사십 년이 넘었지만 부모님은 서울살이가 답답하다. 눈이 오면 눈이 궁금하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궁금하다.


  밭에 도착하면 차를 제대로 세우기 전에 차문부터 열어야 한다. 아버지는 주차하는 일 분을 참을 수 없다. 겨울이면 나무와 풀에 가려있던 산과 밭의 맨몸이 드러나 또 다른 풍경이다. 아버지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들이마신다. 아버지는 그 풍경의 일부가 된다. 한겨울 아버지를 반기는 건 입구에서 커다란 솔가지를 드리우고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뿐이다.


  제일 먼저 비닐집의 난로부터 피워야 한다. 솔가지와 솔방울을 불쏘시게로 삼아 불을 피운다. 마른 장작을 몇 개 넣어 불을 돋운다. 불은 쉽게 피어지고 비닐집은 금방 훈훈해진다. 겨울이지만 춥지가 않다.

     

  어렸을 적 겨울은 매섭게 추웠다. 손끝 발끝 코끝이 시리고 양볼은 빨갛게 홍시가 되었다. 변변한 방한복도 난방시설도 없었다. 오리털 파카는 구경도 못했고 아궁이에 불을 떼 방을 덥혔다. 내외의 경계는 얇디얇은 창호지 한 장의 홑문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맡에 놓아둔 자리끼가 꽝꽝 얼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거의 에스키모 수준이다. 어떻게 그리 살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그때가 싫거나 애달픈 기억은 아니다. 추웠지만 즐겁고 행복했다.


  겨울 아침 마당은 구수한 쇠죽 냄새로 가득 찼다. 아침 일찍 일어난 아버지는 콩깍지와 볏짚으로 소여물을 쑤고 물을 데웠다. 엄마가 데운 물을 마루 앞 세숫대야에 부어 놓으면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물 식기 전에 씻으라는 엄마의 재촉에 마지못해 내복바람으로 나가 고양이 세수만 하고는 후다닥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마루에 올라 검고 동그란 무쇠 문고리를 잡으면 ‘짝’하고 손이 달라붙어 깜짝 놀라 비명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눈이 오면 마당은 쓸지 않고 싸리비를 들고 방죽으로 갔다. 발목까지 쌓인 눈을 쓸어가며 썰매 탈 길을 열었다. 눈이 쌓인 채 녹으면 얼음판이 거칠어져 썰매가 잘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썰매가 싫증 나면 비료포대에 볏짚을 넣어 산으로 갔다. 머낭골 넘어가는 산기슭에는 제법 큰 무덤이 있었다. 무덤을 덮은 잔디밭은 훌륭한 눈썰매장이 되었다. 그렇게 겨울을 즐기고 겨울을 놀았다.

      

  오늘은 육 남매 중 다섯이 모였고 손주 셋도 함께 왔다. 아버지는 난로에 물을 데우고 엄마는 시래기 된장국을 끓인다. 아버지는 작은 대야에 하얀 김이 솔솔 오르는 더운물을 부어 손을 씻으라 한다. 엄마는 하얀 쌀밥을 고봉으로 담는다. 투명 비닐을 통해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하얀 쌀밥은 수정처럼 빛난다. 소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이 겨울 내곡리 비닐집은 여전히 따스하다. (17.2.3, 23.12.22)



                                                                                                        ⓒphotograph by soddongguri(22.1.1)





작가의 이전글 우리라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