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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래 Jun 07. 2022

아버지를 따라 두메산골로

에피소드 1-나는 딸이었다

 일곱 살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아주 멀리 강원도 홍천군 산골에 있는 당무초등학교로 발령이 나서 우리 가족은 그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먼저 부임하시고 엄마와 남동생, 그리고 중풍에 걸리신 할아버지는 좀 더 나중에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아주 깊은 두메산골이었는데 1학년과 4학년, 2학년과 5학년, 3학년과 6학년이 한 교실에서 복식 수업을 하는 아주 작은 학교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아버지께서 술을 좋아하셔서 학교에 미움을 사서 강릉에서 홍천군으로 귀양같이 전근을 보낸 거였다. 


 그곳 학교 운동회는 온 마을의 잔치였고 소풍 또한 온 마을의 나들이였다. 행사 때면 온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즐거운 하루를 보내곤 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그곳 아이들이 머리를 자주 감지 않아 이가 생겨 학교에서 머리를 자르고 오라고 한 일이 있었다.

 “선생님, 미래는 머리가 우리보다 더 긴데 왜 자르지 않나요?”

 나는 배냇머리부터 길러서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왔었는데 속상했지만 하는 수 없이 머리를 단발로 잘랐다.   

 남동생들과 냇가에서 가재를 잡았고, 산으로 동네 아주머니들을 따라가서 나물을 캤었고, 장날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장에 따라가기도 했다. 그런 추억들이 지금도 아련하다. 어릴 적 나는 아주 부지런하고 활달했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3학년까지 마치고 홍천군 남면에 있는 조금 큰 초등학교로 아버지가 전근 가셔서 동생과 나도 전학을 가게 되었다. 전학 간 첫날 혼자서 4학년 교실을 찾아갔는데 4학년 1반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남자 선생님과 남학생들만 있는 것이 아닌가. 얼굴이 빨개져서 문을 닫고 나와 살펴보니 4학년 2반 교실이 또 있었다. 거기가 바로 우리 교실이었다. 전학 간 첫날부터 실수를 하였지만 그곳에서의 2년은 나에게 처음 하나님을 가르쳐 준 여자 전도사님을 만났고, 우연이, 명옥이, 미향이 등의 좋은 친구를 사귀게 해 준 곳이다.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많이 보고 싶다.    

 

 4학년 담임선생님이셨던 전정숙 선생님은 처녀 선생님이셨는데 고향이 춘천이셨다. 내 기억에 춘천에서 부모님께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주말마다 춘천에 다녀오셨는데 주말에 춘천을 다녀오시면 동화책이랑 영화를 본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다. 그때 들은 ‘헬렌 켈러’ 이야기가 무척 감동적이어서 그때부터 우리 선생님 같은 좋은 선생님이 되려는 꿈을 키운 것 같다. 부모님을 모셔놓고 학예회를 할 때 국어책에 나오는 ‘걸레’라는 연극에서 ‘순이’를 맡아서 연기하였고, 우연이와 멋진 무대복을 입고 그 시절 한참 유행이던 트위스트를 추어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때의 끼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무용을 선택과목(교대가 그땐 2년 제라 전공이 없었음)으로 정하게 해 준 계기가 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5학년을 매산초등학교를 더 다니고 부모님께서 나의 장래를 걱정하셔서 6학년 올라갈 때 외가가 있는 강릉 경포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경포초등학교는 이율곡 선생님이 태어나신 오죽헌 바로 옆에 있던 학교로 어머니와 이모도 이 학교를 졸업한 선배이다.     

 전학을 가서 여자 반인 6학년 2반에 배치되었고 담임선생님은 남자 선생님이셨다. 이곳은 4학년부터 1반은 남자, 2반은 여자 반이었다. 전학을 가자마자 실시한 반장선거에서 부반장에 당선되었다. 전학을 왔지만 공부도 조금 잘하는 것 같고 강릉 사투리를 쓰지 않고 서울말을 써서인지 친구들에게 호기심과 기대감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6학년 가을에 외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이모부가 안 계신 이모와 사촌 동생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이모부도 몇 년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셔서 이모가 친정인 외가에 와서 함께 생활하며 계셨다. 외가는 선교장 옆에 있는 초가집이었는데 박물관이 들어서며 집도 헐리게 되어 지금은 없어졌다. 이모와 외할머니께서는 겨울에는 가마니를 짜고 봄부터 여름까지는 누에를 키우셨고 텃밭에 채소를 길러 팔아서 생활하셨다.    

  

 어머니께서는 강릉에 자주 오시지 못하셨다. 그래서 나는 방학이 되면 홍천에 있는 집에 가서 보내고 개학이 가까워지면 다시 강릉으로 내려오곤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6학년 여자아이가 강릉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중간에 횡성에서 다른 버스로 또 갈아타고 버스에서 내려서도 먼 길을 걸어서 혼자 집을 찾아갔던 일이 너무나 용감하고 대견한 것 같다. 지금 같으면 위험하다고 절대 혼자 보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렇게 초등학교를 두 번이나 전학을 갔지만 6년 동안 줄곧 우등상을 받았다. 아버지께서 상장을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하고 계셔서 누렇게 변하고 빛바랜 우등상장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초등학교로 바뀌었지만 국민학교에서의 추억은 지금도 아련하다. 어렸을 때 살았던 두메산골에는 그곳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 묘지도 있어서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는 성묘하러 가곤 하였지만 오래전부터 가지 못했다. 대신 막냇동생 부부가 지금도 매년 성묘를 하고 있다. 지금은 그곳도 많이 변했겠지만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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