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미래 Jun 11. 2022

아버지 꿈, 내가 이루다

에피소드 3-나는 선생님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성실하게 근무한 나는 마흔 살이 될 때까지 교감 승진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학교에서 시범 수업이 있을 때면 교감 선생님께서 부탁하면 거절 못 하고 동 학년 대표로 공개수업을 하곤 하였다. 새로 전근 간 첫해 5학년 담임이었는데 한 학년에 한 반씩 대표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5학년 대표로 수업을 하게 되었다. 국어 수업을 하였는데 그날은 계획한 대로 수업이 잘 이루어졌다. 다른 선생님들이 보시기에 좀 색다른 수업이라고 생각되었는지 수업 참관하신 선생님들과 교장, 교감 선생님께서 많이 칭찬해 주셨다.   

   

 이 수업을 계기로 그다음 해에 처음으로 시행된 1교 1 교사 수업개선 연구교사로 추천이 되어 1년 동안 다양한 수업을 하게 되었다. 과목은 국어였고 그 당시 한참 유행했던 열린 교육을 기본으로‘총체적 언어 학습을 통한 언어 사용능력 신장’이 연구 주제였던 것 같다. 3학년 담임이었던 나는 수업을 위해 연수도 많이 다녔다. 나름대로 연구도 많이 하였으며 수업자료도 많이 만들었다. 본교 교사뿐만 아니라 외부 장학사, 교사를 대상으로 수업 공개도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그 당시는 컴퓨터가 학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교실에 컴퓨터도 없었던 시절이다. 컴퓨터 워드도 못 하던 나였기에 처음에는 연구부장님께서 연구 계획서를 도와주셨다. 교수학습 지도안은 손으로 작성해 주면 회사에 다니는 친지가 컴퓨터로 작업해 주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고 책임감이 많은 나는 컴퓨터 워드도 배워 좀 서툴긴 하였지만 연말에는 보고서 등도 혼자 작성하게 되었다. 지금은 모든 학교, 학급에 컴퓨터가 놓이고 컴퓨터를 활용해서 수업하고 있지만 그때는 컴퓨터 작업 하나하나도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 해 수업개선 연구교사 덕인지 그다음 해에 첫 부장 교사로 수업 연수부장이 되었다. 처음 제출한 ‘독서교육 실천사례 연구대회’에서 서울시 1등급을 받게 되었는데 그 연구 점수가 교감 승진에 사용하는 큰 점수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2000년에 남부교육청 관내 학교에 근무하던 나는 아파트 입주로 인해 검단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학교도 강서교육청 관내 초등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근무한 6년 동안 매년 연구대회에 참가하게 되어 연구 점수를 획득하게 되었고, 보직교사, 직무연수 등 교감 승진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2년제 교대를 졸업한 나는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경인교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도 받았다. 하지만 연구학교 가산점이 별로 없어서 승진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함께 근무했던 김교감님께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초등학교 초빙교사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 덕분에 나는 2009년에 교감 연수를 받게 되었고 2011년 9월 1일 자로 교감으로 승진하여 초등학교 교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의 기분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부모님, 가족들, 주변 지인들 모두가 축하해 주었다. 특히 친정어머니께서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어 드렸다고 눈물을 글썽이시며 정말 좋아하셨다.     


교감 5년 반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지만

 ‘어떤 일을 하려는 사람은 방법을 찾고, 하기 싫은 사람은 핑계를 찾는다.’

라는 글을 마음에 새기고 인성과 실력을 갖춘 교감이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실 이전 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선배님이 교장 선생님이어서 마음이 잘 맞아서 3년 동안 함께 학교를 잘 운영하여 여러 가지 학교 표창도 받게 되었다. 특히 전국 100대 교육과정 우수학교 교육부장관상도 받게 되어 너무 영광이었다. 첫 학교 교감 3년 후에 다른 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는데 이전 학교에서 모셨던 교장 선생님과 다시 근무하게 되었다. 두 번째 학교에서도 다양한 교육과정을  운영하여 학교가 매년 표창을 받게 되었다. 그 덕분인지 국회방송 ‘인성이 미래다’란 프로그램에도 나오게 되었고, 여러 가지 매체에 학교가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교감으로 근무하던 중 2015년 봄에 교장 연수를 받게 되었고 2017년 3월 1일 자로 교장이 되었다.     

 친정아버지께서 내가 교사로 발령을 받고 서울로 오기 전에 기안문 한 장을 샘플로 써 주셨는데 초임 교사는 기안할 일이 없었다. 발령받자 아버지께서는

 “서울 가면 연구를 꼭 해라.”

라고 당부하셨는데 그때는 그 말씀의 의미를 몰랐지만 세월이 지난 후 연구로 점수를 따서 꼭 교감이 되라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친정아버지는 교감이 되고 싶어 하셨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시고 51세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나를 너무나 예뻐해 주셨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난 많이 울었었다. 그러며

 ‘아버지가 못 이루신 꿈을 제가 이뤄 드릴게요.’

하고 다짐을 하였다. 승진하기 위해서는 근평을 잘 받아야 하는데 내 점수가 다 찼음에도 근평을 못 받아 힘들었던 때도, 대학원 논문을 쓰며 힘들어서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뜻을 받들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어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또한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그분들께도 고마움을 표한다. 특히 내가 대학원에 다니고, 자격증을 따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도 묵묵히 지원해준 남편과 아들들에게도 고맙다.


이전 17화 교사, 이제 시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