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에 웃을 수 없을 때
"하하하하하핫."
나는 텐트에 누워서 새벽 2시쯤에 눈을 뜨고는 웃었다. 이제야 농담이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영어를 잘 안다고 자부하며 미국에 와 놓고 남들이 농담하는 것도 뒤늦게 알아듣는 신세라니.
내가 미국의 여름 캠프에 캠프 카운슬러로 참석했던 것은 대학교 3학년의 여름방학 때였다. 영어교육과의 학생들은 많이들 미국에 공부하러 가던가 여행이라도 하러 간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늘 문제는 돈이었다. 미국에 가고 싶으면 가도 되지만 돈을 들이지 않는 방법, 그것은 미국에 가서 돈을 버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찾아낸 프로그램이 CCUSA라고 외대의 교수님이 운영하시던 프로그램이었다. 미국에서는 방학 때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캠프에 보내는 일이 흔했다. 캠프의 기간은 일주일 정도. 캠프의 종류는 다양했다. 걸스카우트 캠프, 종교 캠프 등등. 아이들은 일주일 머물다 가는 것이었고, 우리는 석 달가량을 머물면서 아이들을 지도했다. 카운슬러의 3분의 2는 미국인이었고, 나머지는 international staffs였다. 미국의 캠프는 아이들의 다양한 경험을 원했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의 카운슬러들을 모집해서 아이들에게 세상은 넒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어 했다.
"Teacher, Where is South Korea? Is it a state of America?"(선생님, 한국은 어디에 있어요? 미국의 주인 건가요?)
어린 camper들, 즉 학생들은 정말로 한국이 미국의 주나 도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이 국가라고 인식시켜도 그다음 순서는 대체, 한국은 어디 붙어있는 나라냐는 것이었다. 대체로 'between Chiane and Japan'이라고 설명해야 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대답을 하고 나면 우리의 국력이 약한 것이 마음이 아프곤 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 방탄소년단, 싸이같이 문화적으로 우리를 널리 알려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는지.
우리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카운슬러들은 대체로 우리를 안다기보다는 북한을 알고 있었다. 나를 보면 핵 문제를 언급하거나 여성의 인권문제 등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함께 휴일에 놀러 나가거나 하면 한국에 엘리베이터는 있는지, 껌은 있는지 묻곤 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애국자가 되어 '샌프란시스코와 거의 비슷한 곳이 우리나라에도 있는데, 그곳의 이름은 '명동''이라고 말하곤 했다.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명동을 돌아다니며, "비슷하지는 않구먼. 그래도 좋네."라고 웃으며 이야기하곤 했다.
영어교육과를 다니고 있었고 엄마의 교육열 덕에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부터 외국인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웠었던 나는 영어를 잘한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막상 나가서 일을 하다 보니 내 마음대로 말을 못 해서 답답한 일이 많았다. 특히 다들 함께 농담을 할 때 다들 웃으면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없어서 그냥 무조건 따라 웃곤 했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새벽에 깨달음이 찾아오면 그때 혼자 숨을 죽여 웃곤 했다. 내가 영어를 가장 기가 막히게 구사했을 때는 화가 나서 쏘아붙였던 때였는데, 지금은 나도 정확한 내용이 기억이 안 나지만 화가 나서 막 쏘아붙일 때랑 술 마셨을 때가 가장 영어가 술술 나왔었었다.
나중에 올 때가 거의 다 되었을 때 꿈에 나오는 인물들이 모두 영어를 했었다. 아, 이제 영어는 정복인가 싶겠지만 그 무슨 말인가. 그것은 내 두려움이 없어진 시작에 불과했다. 그 후로도 갈 길은 멀었고, 지금도 영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나의 영어는 아직도 멀었다.
아직도 그 시절을 돌아보면 집에 너무 돌아오고 싶었었던 것과 농담에 좀 같이 웃어봤으면 하고 생각했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신다면 나의 대답은, '아뇨, 저는 이제 돈 쓰면서 편하게 지내다가 올 거예요.'
내 도전 정신이 늙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