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샬롯H Sep 10. 2022

러시아에서 온 소녀


나는 내 감정을 선물로 표현하는 편이다. 간단한 감사도 약소한 선물과 하는 걸 선호한다. 그래서 나는 발레를 하며 안면을 트게 된 몇 명에게 노엘 선물을 하기로 했다. 툴루즈에서 만든 다른 친구들과 노엘에 만날 또마 가족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면서 몇몇 아이템을 2, 3개씩 늘려 주문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친해진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려니 무엇을 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돈이 딱히 여유 있는 것도 아니고, 품목을 통일해야 하는데 뭘로 할까 하다가 또마 어머니가 내가 신고 있는 것을 보고 어디서 샀냐면서 탐냈던 메쉬 소재의 디자인 양말을 더 주문해서 가족뿐 아니라 새로운 친구들에게도 선물하기로 했다. 


노엘을 맞아 연말 2주 휴가가 시작되기 직전 마지막 수업 후, 노엘 기념으로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낸 옥타비아와 피라나에게는 각각 다른 디자인의 양말 한 켤레씩을 선물했고 파티엔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리나에게도 양말을 한 켤레 선물했다. 발레 수업이 끝나고 내가 따로 부르니 약간 당황했던 그녀였지만 선물을 건네니 이내 얼굴에 화색이 돌며 나를 꼭 껴안는 게 아닌가? 큰 키에 하얀 얼굴, 누가 봐도 러시아 계라는 걸 짐작할 수 있는 외모의 이리나는 전형적 냉미녀 스타일이어서 그녀의 따뜻한 반응에 내심 좀 놀랐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이리나는 나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선물을 집에 가서 풀어보려고 했는데, 오늘 저녁까지 일을 해야 해서 그냥 학교 복도에서 선물을 열어버렸어. 어쩜 내 취향에 딱 맞는 양말을 선물해줬네. 정말 고마워!"



그녀의 인증샷과 러시아에서 사다 준 선물


그녀는 가족과 연말을 보내기 위해 러시아로 떠났기에, 2주간 노엘 바캉스 내내 우리는 이런저런 문자로 대화할 수 있었다. 그녀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프랑스로 와서 대학원까지 마쳤다고 했다. 프랑스에 산 것은 총 10년 정도 되었는데 툴루즈에서만 7년 살았고, 비교적 최근 남편과는 헤어졌다고. 그녀는 외국인을 위한 프랑스어 선생님이자 러시아어, 프랑스어 수어 선생님이었다.


나 역시도 비슷한 전공을 했고 한국인을 위한 프랑스어 선생님이라는 것을 말하니 직업 때문에 그러는 건지 타지 사는 외국인끼리라 더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이엔 동질감이 형성되었다. 그녀도 피라나와 마찬가지로 내 나이를 듣자 놀랐다. 그녀는 내가 대학생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우리가 같은 나이였기 때문이다. 


나와 동갑임에도 그녀를 '소녀'로 부르고 싶은 것은 그녀의 조곤조곤한 말투와 항상 치마나 원피스를 입고 머리는 신경 써서 꾸미는 그녀의 모습 때문이다. 그녀는 소녀 취향답게 나비, 잠자리, 꽃 모티브의 옷이나 액세서리를 좋아하고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물병이나 그릇을 좋아한다. 


연말 휴가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이리나는 나에게 외출을 제안했고, 순전히 내 취향으로 고른 셰익스피어 연극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보러 갔다. 연극을 보기 전 시간이 남아서 그녀가 자주 가는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리나는 문자를 주고받으며 여러 번 꼭 보답으로 선물을 주겠다고 했는데, 러시아에서 사 온 허브티 봐 초콜릿을 내게 수줍게 건네주었다. 나는 웬만하면 고전 작품을 볼 때 철저히 준비하는 스타일이라 원작 희곡을 읽고 갔고, 이리나는 전혀 준비 없이 왔길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다른 연극도 보러 갔고, 그녀의 일이 적당한 시간에 끝나는 목요일 저녁마다 만나서 레스토랑에서 또는 카페에서 수다를 떨곤 했다. 그녀는 초밥을 아주 좋아했지만 아시아 문화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고 나도 러시아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우리는 출신국에 대한 대화를 자주 했다. 내가 알게 된 것 중 특이한 러시아 문화는 커플 간 경제권에 관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100% 내야 하며 추후 같이 살 경우 생활비 일체를 모두 내야 한다고 한다. 여자가 버는 돈은 모두 여자가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며 자기에게만 필요한 물건을 사는 데 쓴다고 한다. 그 이유는 러시아에서는 여자와 남자의 임금 차이가 심해서 여자가 버는 월급은 용돈 벌이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수다를 떨기 좋아하는 내가 그녀와 일주일에 한 번씩 데이트를 하며 느꼈던 즐거움은 내가 툴루즈에 마음을 붙이도록 해주었다. 물론 발레 하는 친구들 그룹에서도 우리 둘끼리 더 친하다는 암묵적 룰도 생겼고 말이다. 이번 여름 그녀는 새로운 학교에서 여름 특강 프랑스어 선생님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비상 연락망에 내 이름과 번호를 적어도 되냐고 물어봤다. 나는 대답했다.


"당연하지! (Bien sûr, avec un grand plaisir !)"



연극을 보기 전 극장에서


이전 09화 광란의 크리스마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