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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롯H Sep 18. 2022

결핍의 부스러기


나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나보다 15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연장자에 대해 강한 호감을 가지는 경우, 그 어른이 나의 부모님이 된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나의 얄팍한 심리학적 지식에 따르면 이건 일종의 감정 전이 현상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첫 번째 대상은 대학시절 지도 교수님이었다. 선생님은 지성과 따뜻함을 동시에 갖춘 동시에 소탈한 어른이었고, 개인적으론 성인이 되면서 난생처음 만난 이상적인 어른이었다. 대학교 4년, 대학원 2년 내내 '선생님 같은 아버지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을 되풀이했다. 


선생님도 나를 좋은 제자로 생각하고 잘 보살펴주셨지만 내가 대학원을 떠났을 때 연락 한 번 따로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 내심 서운했던 것을 보면 이 사제지간에 대해서는 내 생각보다 애착이 더 컸던 게 분명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어쨌든 남인데'라는 생각을 되뇌었고 앞으로는 다른 어른을 멋대로 지나치게 가깝게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까지 했다.


발레를 배우며 만나게 되고 점차 주당 수업 횟수를 늘려가다 보니 발레 스튜디오의 선생님 두 명, 엠마뉘엘과 민은 내가 일주일에 최소 2번씩은 만나는 연장자가 되었다. 


민은 유하고 친절하면서도 무용수로서의 프라이드와 열정을 갖춘 사람이었다. 왕초보 시절 많이 어리바리할 때 내가 수업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민의 덕이다. 툴루즈 카피톨 발레단(Ballet du Capitole de Toulouse)의 안부가로 활동하고 그만둔 후에도 많은 발레단 무용수들이 여전히 그를 만나러 오는 것을 보면 그의 인격은 공인된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발레를 같이 하는 친구들은 다정한 아버지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민을 파파 풀(papa poule)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암탉 아빠' 정도로 해석하려고 한다. 민은 비슷한 동남아시아계 뿌리를 가지고 있는 피라나와 구소련 시절 키이우에서 무용을 시작해서 러시아어에 능통한 탓에 러시아인인 이리나에게 더한 친근함을 표현하며 이름이 아닌 애칭으로 불렀다. 왠지 내심 조금 서운했던 것을 보면 나도 그녀들과 같은 대우를 받길 내심 바랐던 것이겠다.


엠마뉘엘은 첫인상은 차가운 편이지만 한 번만 그녀의 수업을 들으면 그녀가 얼마나 열정적인 무용수이자 선생님인지 알 수 있다. 점점 내 실력이 늘어감에 따라 수업에서 이런저런 동작을 나를 모델로 보여주기 시작하자 나는 또 감정 전이에 빠졌다. 마치 엄마에게 잘 보이고 싶은 아이처럼 더 열심히 발레를 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빠는 딸 둘 중 첫째인 나를 더 예뻐했다. 그럼에도 아빠는 항상 부재중이었고, 나도 모르게 엄마가 나보다는 동생을 편애한다는 생각을 가지며 자랐다. 어찌 된 영문인지 머릿속엔 아빠와 내가 한 편, 엄마와 도생이 한 편이란 생각이 자리 잡혔다. 첫째이니 동생에게 져줘야 한다고 혼날 때도 왠지 말 그대로의 내용으로 와닿지 않고 '엄마는 역시 나를 미워해'라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어릴 때 자연스럽게 익숙해져 있던 부분이라 우울증을 겪으며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비로소 엄마가 나를 미워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아이가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젓한 첫째'라도 어린이는 어린이인데 당연히 엄마의 사랑을 갈구했을 테지만 충분히 얻지 못했고, 아빠의 편애는 알고는 있었지만 누릴만한 절대적 시간이 모자랐다.


아빠와의 관계가 돈독했다고 생각했기에 아빠가 엄마를 떠났을 때 충격은 나에게도 엄청나게 크게 다가왔다. 16살의 나는 '어떻게 아빠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배신감에 떨었다. 그때 나는 이미 다 컸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아버지의 공백은 너무도 큰 상처를 남겼다. 이렇게 저렇게 애정에 대한 갈구는 이어졌고 누군가가 나를 어른으로서 이끌어주고 보살펴주기를 바라는 삶을 살아왔다. 


성인이 되면서도 끝이 나지 않았던 경제적 어려움으로 19살부터 장학금을 신청할 때 알지도 못하는 기관의 수많은 서류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며(그 당시엔 온라인에서 해결할 수 있는 서류가 극히 드물었다) 떼어야 했던 경험들은 나에게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요청 서류 종류 자체가 내가 '가난하다'라는 걸 얼굴에 써 부치는 꼴이라 좋지 않은 대우를 받기 일쑤였으니 심적 자괴감은 덤이었다. 


20대 초반의 내가 이 과정을 오롯이 혼자서 해결해야 했을 때의 외로움이 경제적 어려움 그 자체보다 나에게 더 생채기를 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을 때도 혼자서 헤쳐가는 것이 나의 삶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게 내가 원한 것은 아니라는 열등감 또는 억울함이 항상 남아있다. 


또마와 사귀기로 결심한 큰 원인 중 하나는 그가 이전 남자 친구들과는 달리 '책임'과 그로 인한 '부담'을 전혀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할 일을 가끔 대신하거나 그 과정을 기꺼이 같이 해 줄 사람을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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