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7, 8월 바캉스이라 많은 곳이 문을 닫는다. 비자를 갖고 프랑스에 다시 돌아온 것이 6월이라 바캉스 기간 내내 사람을 만날 만한 곳이 없었던 데다가 코로나19로 인해 사람이 모이는 장소는 죄다 폐쇄되어 툴루즈에 친구를 만들만한 모임을 찾을 수 없었다. 타국에 사는 프랑스인 친구의 의견을 조언을 받아들여 툴루즈에 있는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문의를 했지만 거기도 신청하려던 여름 수업이 폐강되고 말았다.
그 시기 또마 외할머니의 유품 중 받게 된 나는 미싱을 사용하는 수업을 찾아보기로 했다. 도보로 대략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적당한 초급 '홈 패션' 수업을 찾게 되었고, 나는 상담 후 한 학기를 등록했다. 발레 수업을 찾을 생각을 하기도 전에 처음으로 등록한 수업이었다. 처음 두 달은 가방을 만들었고 그 이후엔 치마를 만들었다.
손재주가 있는 편이라 수업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더 중요한 목적인 친구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는 실망스러운 성적표를 얻었다. 서너 달간 친구를 사귀기는커녕 말을 나눈 사람이 선생님 외에는 손에 꼽힐 정도였다. 다소 덤벙거리는 탓에 나에게 자주 설명을 확인한 메리엠이라는 여성과 몇 마디를 나눴지만, 그마저도 정부 방침에 따라 2차 접종까지 완료된 백신 패스 제시를 의무로 하고 신속 항원 검사는 더 이상 수업에서 허용되지 않게 되자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은 학생들은 수업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메리엠을 더 이상 수업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발레 수업에서 친구가 서서히 생기던 때인 12월, 마지막 홈 패션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국적의 학생이 오가는 발레 학원에서와는 달리 여기선 내가 수업을 듣는 유일한 동양인이자 외국인인 데다, 이미 몇 년간 수업을 듣는 사람들끼리 나름대로 친한 상태여서 내가 끼어들만한 틈이 없었던 것도 같았다. 미싱을 사용하는 기본 원리는 습득하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니 무위의 시간이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는 코로나19가 유행하고 1년 반 정도가 지난 상태에서 프랑스에서 입국을 했다. 이미 벌이가 줄어든 지도 1년이 넘었고 나의 불안감이 시작된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된 상태로 이민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불안은 점차 가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대학생 시절 슬럼프 이후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낸 것은 너무도 오랜만이기 때문이었다. 그간 아팠을 때든 아프지 않았을 때든 무위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나 스스로에게 죄처럼 느껴지는 무거운 시간이었다. 아파도 시험공부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대학원 숙제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물론 내가 무위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조금의 안정을 다시 얻고 내가 결국 깨달은 것은 이렇게 살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꼭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 그간처럼 치열하게 살지는 않아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프랑스에 도착하기 전 불안 장애를 겪었다는 얘기를 꺼내자 와테투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툴루즈에서 알게 된 친구 중 한 명인 와테투는 케냐인이자 프랑스인으로 이곳에서 8년간 항공 부품 관련 회사에서 일했다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프랑스에 봉쇄령이 내려지고 집에 두 달간 혼자 지냈기 때문이었을까?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번아웃' 상태가 그녀를 덮쳤다고 한다. 갑자기 남의 회사에서 남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이 들어 허무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그렇게 무작정 쉬며 자신만의 것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는 본국인 케냐의 물건을 프랑스로 수입하는 회사를 설립 중이다. 자세한 품목은 아직은 비밀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다 같이 그녀의 새로운 출발을 기대 중이다. 어쩌면 가만히 움츠려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무위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한지도 모른다. '개구리도 움츠려 뛴다'라고들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