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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롯H Oct 08. 2022

떨어진 꼬리표


프랑스로 이민을 올 줄 생각도 못 하고 그 직전 해 가을, 나는 수료 상태로 수년간 내버려 둔 석사 과정을 마무리하려고 재등록을 했다. 당시 어지럼증과 불안 장애에 시달리던 중이었기에 얼마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결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심리적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마음에서 시도했던 일종의 발악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해가 바뀌고 갑자기 프랑스로 떠나기로 마음을 먹게 되면서, 또 무기력함과 불안에서 빠져나오려 노력하면서 공부는 완전히 손을 놓게 되었다. 6개월 정도가 흐르고 차마 연락하지 못한 대학원 지도 교수님의 메일을 받았다. 내 논문 주제를 다른 학생이 써도 되겠냐는 메일이었다. 나는 미리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고 당연히 그렇게 해도 된다는 동의 의사를 전달했고 지금은 몸이 안 좋아 서울을 떠나 있다고 답장했다. 


코로나 시국임에도 과 교수님들을 다시 만나면서까지 재등록을 했지만 그렇게 나는 흐지부지 영원한 석사 수료생으로 남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마치 오점같이 남은 수료생이란 신분을 만회하려던 것 같다. 하지만 세상 일엔 때가 있으며, 공부가 특히 그중 하나이며, 인생엔 어쩌면 오점으로 남아야 하는 일도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새기게 되었다. 


괴로운 일이지만 나의 패배를 스스로 곱씹고, 완전한 포기를 인정하자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공부가 그렇게 좋다면 언젠가 또 시작하면 된다는 어설픈 자기 위로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대학이란 꼬리표와 더불어 그에 따라오는 자기 검열도 내려놓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좋은 대학을 나왔으면 공무원을 하든지, 회사를 다니든지 하지 왜 그런 일을 하느냐' 같은 말을 자주 들었다. 특히 어른들은 도대체 내 선택을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말을 열심히 무시하면서 살았지만, 자꾸 빗방울이 나의 얼굴을 때리는데도 앞으로 나아가려면 역시 에너지가 드는 법이다. 가져다준 이득도 무수히 많았겠지만 대학 꼬리표의 무게는 생각보다도 더 많이 무거웠던 것 같다. 


모름지기 30대 중반에는 살아야 하는 '평균적 삶'의 모습을 프랑스에서는 딱히 따르지 않아도 누구도 훈수를 두지 않는다. 물론 가족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나는 여기 혈혈단신이니 내가 원하던 대로 삶을 꾸릴 자유가 주어졌다. 게다가 또마와 한 가구를 이뤄 사니 느껴본 적 없는 경제적 안정감은 플러스알파였다. 그렇게 나는 프랑스에서 온전히 내 이름만을 가지고 외계 행성에 떨어진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프랑스에서는 통성명도 "이름이 뭐예요?(Tu t'appelles comment ?)" 서로의 이름을 묻는 것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여기에 한 단계 나아가면 직업 정도를 물어볼 순 있겠지만 그게 전부이다. 나이나 결혼 여부는 묻지 않는다. 대학 같은 거추장스러운 이야기는 내가 외국인이기에 더더욱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다.


정해진 틀을 너무도 싫어해서 회사에 적응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시작한 프리랜서로서의 삶으로 인해 항상 물에 섞이지 않는 기름처럼 사회에 섞이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부담감이 한국에서는 나를 항상 짓눌렀다.


여기서는 등이 파진 옷을 입든, 끈 나시를 입든, 타투를 했든, 점심시간마다 발레를 하러 달려가든 누구도 뭐라 하지 않고 또 뭐라 해서도 안 된다. 1년 반의 프랑스에서의 삶은 나의 어깨를 짓눌렀던 짐을 많이 거둬갔고 이제 나는 속도 내어 뛰어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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