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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롯H Oct 17. 2022

새로운 터전


얼마 전 법적으로 노동 허가 비자로 나의 신분이 전환되면서, 수년 전 한국에서 취득해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 학사 전공과 한국어 교원자격증 2급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작년에 무기력한 심리 상태가 이유 없이 들뜬 조증 삽화 같은 시기로 전환된 때가 있었다. 이번에는 마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새로운 공부를 하고 직업을 가지고 싶고, 그게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몇 달간 지배했다. 


그로 인해 돈과 시간을 허비한 후에서야 마침내 내 심리 상태는 정상으로 돌아왔고, 남들이 계속 권했는데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거라고 우기며 하지 않았지만, 그간 내 커리어와 잘 이어지는 일을 마침내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학생들을 모집하는 방법은 이미 잘 알고 있어 행동으로 옮기자 수업을 금세 시작할 수 있었고 지금도 수강 문의가 느는 중이다. 


지난달 정식으로 프리랜서 신고를 하고 분기별 세금 신고를 하려고 보니 프랑스는 프리랜서에 대한 세금이 최소 22%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나이가 어리면 감면을 많이 해주는데, 내 나이는 이미 30대 중반이라 해당 사항이 없고, 다른 세금 감면 혜택의 수혜자 기준이 들어가지 않아 눈물을 머금고 세금을 내기로 했다. 나도 얼마 간의 소득이 있어야 또마와 공동 명의로 주택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성실히 소득을 신고하고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김없이 발레 수업도 9월 개학을 맞이했다. 이제 초급 수업은 민과 엠마뉘엘이 아니고 마르탱(Martin)이라는 새로운 선생님이 가르치고 있다. 처음에는 학생들 이름 묻지 않거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어쨌든 지금 마르탱은 내 이름을 외웠다. 발레를 통해 알게 된 친구들을 보면 나뿐만이 아니고 조금은 수업에 흥미를 잃은 느낌이지만, 나는 이런 애매모호한 시기를 잘 보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몇 년은 꾸준히 해 볼 생각이다. 


여름휴가 기간에는 그간 못한 것 중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여기서 아는 모든 사람들이 수영을 해서 자주 물가로 놀러 가는데, 나만 맥주병인 것에 도대체 화가 나서 마침내 결심을 한 것이다. 이미 한국에서도 수영을 배우려고 결심한 적이 있으니 수영복, 수영모, 수경을 이미 갖고 있어 마음먹으니 비교적 빨리 시작할 수 있었다. 9월 내내 새로운 일로 바빠진 데다 발레 주 3회가 꽤 버거워진 바람에 두세 번 듣고 미뤄뒀던 수영 수업 10회 권이 2월이면 만료된다는 것을 보고 이번 주말에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혼자 헤엄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지난 주말엔 툴루즈에서 멀지 않은 알비(Albi)에 다시 다녀왔다. 작년 초에 이미 갔었지만, 생필품 가게 외엔 모두 문을 닫아 도시 전체에 스산한 분위기만 감돌았던 시기여서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젠 모두 정상화되어서 비로소 제대로 된 도시 구경을 했는데, 알비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유서 깊은 도시이자 또마가 학생 시절 4년간 산 도시이기도 하다. 그 시절 자주 갔던 레스토랑 몇 군데 가 봤지만 하나같이 문을 닫아서 그는 시무룩해졌다. 코로나가 이렇게나 많은 것을 또 바꿔 버렸다면서 우리는 또마의 친구 위고가 일전에 추천했다는 레스토랑에서 대신 점심 식사를 했다. 


Jardins du palais de la Berbie에서

또마는 베르비 궁 정원(Jardins du palais de la Berbie)을 구경하는 동안 알아서 내 사진을 척척 찍어주었고 내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미술관에도 동행했다. 아직 프랑스에 작은 도시, 숨겨진 명소엔 많이 가보지 못한 나를 위해 또마는 이런저런 도시와 마을을 구경시켜주고 있는데, 이번 알비 방문은 물론이고 올해 여름 바캉스로 다녀온, 절경으로 유명한 베르동 계곡(Gorges du Verdon) 역시 그런 노력의 일부이다. 


남들에겐 조금은 무모해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늘 불안한 나의 손을 굳건하게 잡아줄 사람을 만났다는 확신 하나로 프랑스로 온 나의 선택은 아직까지는 기꺼이 옳았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까지 헤쳐온 스스로가 내심 대견하기도 하지만, 프랑스에 오며 겪은 고군분투가 결코 오롯이 나 혼자만 겪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혹여라도 또 무너진다 해도 내 뒤에 나를 지탱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에 무한한 안도감을 느끼며 나는 이 새로운 터전에서의 도전을 이어나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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