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각자의 길이 있다.
2024년 3월 27일
나의 병휴직이 시작된 지 27일째가 되었다.
1학기 병휴직을 내기 전까지 많은 생각들이 오갔었지만 그중에서 '병가를 내고 학교에 출근하지 않는 것이 옳은 행동일까?'따위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2024년 3월에 학교에 가면 나는 죽는다.'는 생각이 너무나 확고했기 때문이다.
교단에 들어선 이후 나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중 나를 무너지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사건들은 명백하다. 학교폭력 업무 전담 교사로서 혼자 과도한 업무에 시달린 것, 지속적인 악성민원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던 것, 다시 용기를 내어 학교에 복귀하였을 때 첫 근무지에서 관리자들에게 갑질과 폭언, 교육활동침해 등을 당한 것. 이 모든 것들은 4년간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그 후 2023년 10월에 갑질신고를 했음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2024년 2월에는 지속적으로 겪어 왔던 2차 가해에 대한 신고와 함께 병휴직을 하게 되었다.
내가 N연차 우울증 환자가 된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상처가 회복될 틈도 없이 계속 괴로운 일들은 연속으로 다가왔다. 이쯤 되니 '이 일들이 지나고 나면 편해질 거야.'라는 생각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 망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나는 너무 지쳤고, 사소한 스트레스에도 큰 타격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2024학년도 1학기 병휴직은 나에게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선택이었다. 아니, 선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당장 숨 쉴 수 있으려면 학교를 벗어나야 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자살에 대해 생각해 왔고, 이미 많은 정보를 찾아보았으며, 시시때때로 다양한 계획을 구상했었다. 그동안 이 계획들이 실천되지 못하였던 것은 나의 충동성이 충만한 시간에 계획을 실천할 적절한 타이밍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타이밍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도 어쩌면 나의 마음 한편에 있는 망설임과 두려움, 삶에 대한 미련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미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데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것 아닐까?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자살을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 또한 현재 겪고 있는 자신의 괴로운 고통들이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없다. 행복이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만약 미래에 올 그 행복을 겪는 것과 괴로움을 겪지 않는 것 둘 중 택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무엇을 고를까? 미래에도 괴로움은 계속 발생할 것이라는 무한한 공포가 일상이 된 누군가는, 차라리 죽는 순간의 두려움과 공포가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로 죽음을 찾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 누군가였던 나는 그렇게 점점 죽음에 대한 생각이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구체화된 계획들에 충동성만 더해진다면 언제든 완벽히 실행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무섭다. 나의 본심은 항상 내가 행복하게 살길 바라고 있으니.....
언젠가부터 나는 '오늘 하루도 평화롭기를'바라며 살게 되었다. 즐겁고 행복한 일들이 없어도, 나쁜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내가 우울증이 심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대놓고 말하고 다닌다. 나의 말을 장난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심한 우울증이라서 스트레스에 약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자극하지 말라고 하는 나름의 부탁이자 경고다. '나는 당신과 다르다.'라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충고들이 지금의 나에게는 오히려 악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 나를 위한 말들이 나를 더 힘들게 하지만, 나를 위한 말들이기 때문에 충고를 받아들이길 거절하거나, 기분이 안 좋다는 듯이 표현을 하면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된다.
예를 들어 '조금만 참아, 다 지나갈 거야.'라는 말에 '저는 참기 싫어요. 이젠 못 참아요.'라고 한다면, 나는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일을 크게 만드는 사람, 예민한 사람이 된다. 어딜 가나 한 명쯤은 있는 일반적이지 못한 특이한 사람이 내가 돼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이미 몇 년을 계속 참기만 했었다. 그 시간들을 통해 배운 것은 '참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고 나 자신은 더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지난 이야기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짧게 이야기하기엔 너무 긴 이야기들이다. 몇몇 사건이라도 털어놓으며 나의 입장을 설명해 보려 해 본 적도 많았다. 그 후 "방금 한 이야기 말고도 많은 일이 있었어요."라는 말로 그들의 상상력을 아무리 자극해 본들, 내가 겪은 일을 충분히 공감시킬 수는 없었다. 사실 모든 일들은 직접 겪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내가 그동안 아무런 노력도 안 해본 것처럼 섣부른 충고를 남발하는 사람들을 나는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
때로는 교사로서 '내가 사람들에게 우울증이나 자살충동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옳은 일일까?'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우울증이 있는 교사에게 자신의 자녀를 맡기고 싶은 부모님은 없을 것이다. 다른 동료 교사들도 편견을 가질 수 있고, 나와 어울리기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교사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는 것을. 교사도 사람이고, 사람은 힘들고 괴롭다 결국 벼랑 끝에 몰리면 포기하고 싶어 진다. 특히나 요즘처럼 다양한 매체를 통해 누군가의 자살소식들을 쉽게 접하게 된 때에는 더욱더 쉽게 죽음을 연상하게 되는 것 같다.
진심으로 죽고 싶지 않을 때도 사람들은 '살기 싫다.', '죽고 싶다.', '살아서 뭐 하냐.', '죽을 때가 됐나.'등의 말을 쉽게 입 밖에 꺼낸다. 요즘 사람들이 그만큼 지쳐있기 때문일까? 이 말들을 나는 쉽게 흘려듣기가 어려웠다. 나부터도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다 "오늘 술 실컷 먹고 죽어야겠다."라며 진심을 농담처럼 뱉어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죽는 게 무섭다. 그러니 살아 숨 쉬고 싶고, 이왕 사는 거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 그러나 최근 몇 년째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매일 스트레스에 또 스트레스를 받는다.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이 지속되다 보니 신체적 건강도 덩달아 빨간불이 뜬 지 오래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고 했던가. 나는 글러먹었다.
나는 우선 나의 정신부터 잘 붙들어야 몸도 건강해질 것 같다. 우울증의 증상 중 일부인 '무기력, 집중력 저하, 불안, 불면증'은 나의 일상생활을 뒤흔들기에 충분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나의 실수들로 나는 더 우울의 늪에 빠지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건강한 신체'를 만드는 것은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다. 건강하려면 잠부터 잘 자야 하는데, 잠을 못 자니 운동을 하라고 한다. 하지만 운동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악순환의 반복이라는 것이 참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울증으로 인한 무기력은 내가 잠에서 깨어 침대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드라마에서 이런 상황을 잘 설명해 주었는데, 우울증 환자의 입장에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무기력은 단순한 게으름과 다른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힘든 적이 많다. 우울증에 걸린 후 나의 상태는 마치 98년도에 만든 컴퓨터로 최신버전 전쟁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나에게 피해가 오는데 나는 움직일 수 없다.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 속 터지는 답답함. 컴퓨터를 껐다 켜고, 껐다 켜고, 또 껐다 켜고를 반복하다 보면 지쳐서 포기하게 되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고장 난 상태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가만히 있는 것을 싫어하고, 항상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불안감이 올라와서 힘들다 보니 계속 무엇인가를 하는데, 집중을 유지하기 힘드니 이것저것 벌여놓은 일들이 많다. 이 글도 사실은 병휴직 첫날부터 연재하려 했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는 것은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어 나를 괴롭게 한다. 회복을 위해서는 쉼이 필요한데, 나는 쉬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병휴직을 시작하며 나는 쉬는 연습을 해보자 다짐했다.
병휴직을 들어간 나를 보며 누군가는 '아프지도 않으면서 놀면서 월급 받으니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월급이 일부라도 나온다는 것은 좋다. 하지만 '내가 지금 놀고 있는 것일까?'라는 고민을 해보면 답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아픈 게 맞다. 정신이 온전치 못해 사는 것이 힘들다. 예전엔 내가 간단히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지금은 많은 시간을 들여야 가능하다. 그런 상태로 직장에 다니며 일을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더 배로 노력했는지 모른다. 티도 안나는 나만 아는 노력들.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에 노력을 하는 나를 보며 자존감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증명하기 힘든 나의 아픔을 굳이 이해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키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고, 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한다고 해도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나를 가장 많이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나다. 그러나 그동안 살아오며 나는 주변을 돌보기만 했지 정작 스스로를 돌보는 것에는 매우 소홀했었다는 것을 우울증이 생긴 이후에야 알게 됐다. 그 후 나 자신을 잘 돌보자며 다짐했지만 스스로를 돌본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던 나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쉰다라는 명목으로 나는 나를 더 피곤하고 힘들게 했다. 취미의 개수만 계속 늘려나갔을 뿐, 온전히 쉬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병휴직을 하게 된 것이 어찌 보면 잘 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이 기회에 나는 나에게만 집중해보려 한다. 공무상 병가 심사가 진행되고 있고, 갑질신고 후 2차 가해에 대한 조사도 진행 중이기 때문에 사실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쉰다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오롯이 나를 위한 돌봄의 시간을 갖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말하는 '놀면서 월급 받는 병휴직'이 아니라, 나의 '평범한 일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것저것, 다양한 측면에서 나는 일반적인 기준을 벗어났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시키고 싶은 마음도 없다. 좋지도 않은 일에 대해, 여러 번 반복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나를 받아들일 사람은 받아들여주면 고맙고,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생각해도 된다.
주변의 생각까지 신경 쓰며 살만한 여유가 내게는 없다. 그러니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누군가 이런 나를 발견하고 도와준다면 정말 고맙겠지만,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면 방해도 안 했으면 좋겠다. 특히 나를 위한다며 섣불리 뱉어내는 충고들은 나에게 악영향을 주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사절하고 싶다. 충고는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들을 것이다. 똑같은 말을 듣더라도, 내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듣는 것과 낯선 타인에게 듣는 것은 그 의미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 주면 고맙겠다.
나는 사소한 스트레스에도 큰 타격을 받는, N연차 우울증 환자이니까. 지금은 나에게 스트레스가 될 모든 일을 가능한 거절할 것이다. 스스로를 돌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병휴직 기간 동안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며 '회복'을 위해 쉴 것이다. 그리고 병휴직이 끝날 무렵에는 나의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잘 쉬어보자 나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