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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May 21. 2024

나의 특별한 습관이나 규칙

윤혜는 마음이 힘들 때, 여행을 가서 책을 놓고 오는 습관이 있다. 책에는 윤혜의 마음을 조곤조곤 적어둔 쪽지를 끼워둔다. 여행이 끝나고 나면 윤혜는 홀가분해졌다. 종이에 써 내려간 감정, 쓰면서 마음이 더 아려왔던 기분 모두를 그곳에 두고 혼자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윤혜는 자주 덤벙거리지만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두고 온 것은 다시 찾을 뿐이다. 그때도 묶었던 곳에 책을 두고 온 것을 집에 다 와서야 깨달았다. 그런데 그냥 그곳에 두고 싶었다. 여행의 기분을 그곳에 두면 나중에 다시 찾고 싶을 것 같아서였다. 여행과 책이 동시에 떠올랐다. 여행의 기억이 책의 별책부록처럼 쓰였다. 그 후로는 고심해서 책을 고르고 두고 오고 싶은 마음을 적는 것으로 여행의 준비를 마친다. 몇 번 해보니 이것도 요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숙소에 두고 오면 가끔 전화가 온다. 택배로 보내주겠다는 호의를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바닷가에서 한참 앉아 있다가 책을 두고 온 적도 있다.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와 책을 다시 손에 건네주었을 때, 윤혜는 웃음이 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기차나 버스에 두고 오는 것, 커피를 마시러 들른 카페에 두고 오는 것. 윤혜가 찾은 최적의 장소다. 더욱 제격인 이유는 멀리 여행을 가지 않아도 언제든 윤혜가 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윤혜는 감정을 해소했다. 언제든 윤혜가 마음 내키는 대로 실행할 수 있어서 좋았고,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윤혜는 끌로이가든에서 한참 써 내려간 편지 아닌 편지를 반으로 접었다. 책에 끼워 넣고 어디에 두고 올지 한참 생각했다. 결정하지 못한 채로 3호선 지하철을 탔다. 어느 방향으로 탈지 고민하다가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쪽으로 개찰구를 통과했다. 반대편보다 빨리 들어오는 열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거의 끝까지 간 후에 내렸다. 승준과 함께 이곳에서 버스를 또 갈아타고 소풍을 갔었다. 예쁜 꽃이 올라간 비빔밤을 먹고, 산미가 살짝 감도는 드립커피를 마셨었다. 승준이 들고 다니던 사진기에 찍힌 윤혜사진은 아직 남아있을까. 윤혜는 인화된 사진이 갖고 싶었는데 승준에게 말했었는지 안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역사에 한참 앉아 있다가 의자에 책을 두고 밖으로 나왔다.


어려움이 닥쳐도 그건 그냥 삶의 한순간일 뿐이다. 결국엔 모두 스쳐 지나갈 순간. 어떤 것에 실패해도 그것이 실패한 것이지, 나의 존재가 실패는 아니다. 나는 그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존재다. 모든 삶은 흐른다. 로랑스 드빌레르.


승준이 여기저기에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서 선물해 준 책이었다. 이 문단에는 '가치 있는 존재'에 표시가 되어있었다. 스쳐 지나갈 순간이라는 것은 지나고 나면 알지만 그 순간에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윤혜는 책을 받았을 때 생각했다. 이제는 지금이 지나갈 순간이라는 것을 안다. 다만 그 순간과 함께 가치도, 존재도, 윤혜자신도 모두 같이 흘러가 버리는 것 같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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