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수박을 들어본 적은 있다. 사회책이었나, 지리책이었나, 역사책이었나. 임금님 진상 품목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는 각 지역의 특산물이 진상 품목이었으니 좋은 토양에서 뜨거운 볕을 받아 자란 특산품이겠거니 했다. 본 적이 없지만 무등산 수박이라고 특별하게 생겼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맛이 좀 더 좋으려나 생각했을 뿐이다. 우연히 백화점 지하에서 말로만 듣던 무등산 수박을 보았다. '이렇게나 큰 수박이었어? 수박에 줄이 없네?' 하고 무심코 보다가 가격표를 보고 놀라 멈춰 섰다. 30만 원? 세상에나, 30만 원짜리 수박이 있다니. 충격이다.
'무등산 수박이 모두 이렇게 크고 비싼가? 백화점이라 특별히 더 비싼 걸까? 무등산 수박도 투뿔 같은 등급이 있는 걸까? 18킬로라니 크긴 크네. 보통 내가 사 먹는 8-9킬로짜리가 3만 원만 해도 비싸다며 사 먹었는데 대체 몇 배야? 누가 사 먹을까? 산다고 해도 저걸 어떻게 들고 가지?'
예상치 못한 줄 없는 모습과 어마어마한 크기, 엄청난 가격에 놀라 갖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옛날에는 당연히 임금님밖에 못 먹었을 과일이지만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사 먹을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한 채 마치 박물관에서 번쩍번쩍 보석이 박힌 왕관을 본 것처럼 사진 찍고 호들갑 떨며 지나갔다.
최근에 다이어트하게 됐는데, 당을 엄격히 제한하는 다이어트라(스위치온 다이어트) 과일을 한참 먹지 못했다. 과일을 좋아해서 겨울엔 딸기 나오길 기다리고 여름엔 복숭아와 수박을 기다린다. 기다렸던 제철 과일 먹는 걸 큰 기쁨으로 여기는데 과일을 못 먹으니 힘들었다. 다이어트 중 가장 참기 어려운 점 중의 하나였다.
‘무화과는 지금 아니면 못 먹는데. 다이어트 끝나고도 남아 있을까?’
‘복숭아가 끝물이라 한 번 더 사 먹어야 하는데.’
‘국산 블루베리가 이제 곧 안 나올 텐데.’
끝나면 실컷 과일 먹을 생각에 꾹꾹 참았지만 막상 다이어트가 끝나니 그동안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까 봐 두려워 마음껏 먹을 수가 없었다. 한 입 먹고 운동을 하라는데 한 입 먹자고 운동을 하는 것은 좀 억울했다. 요즘 다이어트와 건강식의 핵심 중 하나는 '혈당 관리'고, 과일에는 상당한 양의 당이 포함되어 있어 적게 혹은 거의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난다. 하루에 적정량의 과일이란 포도 몇 알, 사과 1/4 쪽 이런 식이었다. 과일을 좋아하는 것이 내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고 믿어왔는데 이게 웬 청천벽력 같은 소식인지. 아침 사과가 금 사과라는데 1/4 쪽 먹어서 효과가 있을까. 포도는 껍질째 먹으면 좋다는데 그러려면 몇 알 더 먹어도 될까. 얼토당토않은 양이라 믿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그것이 진실이라 정말 소량만 먹어야 한다면, 장 볼 때 과일을 사과 2알, 포도 한 송이, 복숭아 몇 개를 사야 할 것이다. 어차피 많이 사도 상하기 전에 다 먹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사과 한 봉지 살 돈으로 가장 맛있다고 소문난 사과 한 알을 사야 하는 것 아닐까. 이거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나 싶을 만큼의 양,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정도의 양 밖에 먹지 못한다면 몇 입만 먹어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만큼 맛있는 것으로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0 하나가 잘못 붙은 것 같은 가격표가 붙은 채 하나씩 곱게 포장되어 진열된 백화점 과일이 생각난다. 나도 백화점에서 과일을 사 먹을 수 있게 되는 건가 사치스러운 상상을 한다.
방송인 홍진경 씨가 매일 쓰는 물건은 좋은 것으로 채워야 한다고 했다. 매일 쓰는 물건을 내가 좋아하는 물건으로 채우는 것이 나를 귀하게 대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일상을 정성스럽게 가꾸는 것이 본인 자존감의 원천이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그동안 나는 거꾸로 해왔다. 매일 쓰는 물건은 많이 쓰는 만큼 쉽게 닳을 테니 비싸고 좋은 물건을 쓰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물건을 고를 때 크게 고민하지 않았고 그냥 가격이 적당한 실용적인 것들을 골라 샀다. 곰곰이 따져보니 그녀의 말이 틀린 구석이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쓰는 물건이니 마음에 드는, 질 좋은 물건을 쓰는 것이 맞다. 쓸 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을지 생각했다. 그 이후로는 자주 쓰는 물건일수록 더 신중하게 고르게 됐다. 그즈음에 읽은 어떤 미니멀리스트의 책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소유하는 물건의 개수가 적으려면 내 마음에 쏙 들고, 좋은 물건을 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오래도록 아껴서 잘 쓸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값이 비싼 물건이라도 오래도록 잘 쓰면 소모품처럼 쓱쓱 쓰고 버리고 또 사는 것보다 돈도 절약된다는 것이다. 고심해서 고른 몇 안 되는 물건과 세일해서 고른 더 많은 개수의 물건을 비교할 때 어느 편이 만족도가 높을까. 전자가 길게 봤을 때 물건값까지 적게 든다면 그게 진정한 가성비 좋은 소비 아닐까.
이제 다 됐다. 내년에 무등산 수박을 사 먹기 위한 논거를 충분히 쌓았다. 1년만 기다려라, 무등산 수박아. 얼마나 맛있을지 상상해 본다. 달달한 수박향이 코끝에 걸리고 한 입 물면 시원한 과즙이 입 안에 퍼질 테지. 또 식감은 얼마나 아삭할지. 임금이 부럽지 않겠구나. 비싼 수박이니까 하얀 속살까지 맛있으려나. 야무지게 먹으려면 하얀 속살로 팩을 하고 남는 부분은 장아찌라도 담가 먹어야 하나. 수박 한 통을 할부로 사기는 좀 그럴 테니 적금을 들어야겠다. 수박 적금. 계산해 보니 한 달에 무려 25,000원씩이나 해야 한다. 그걸 1년 꼬박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비싸긴 참 비싸다. 여름 내내 수박을 한 통만 사 먹는다고 해도 보통 비싼 게 아니다. 오래도록 두고 먹을 수도 없는데 말이다. 심지어 물가가 올라서 내년에 30만 원보다 더 비싸지면 만기 된 적금에 돈을 더 보태야 한다. 아이고, 이러다가는 수박 사러 가기도 전에 차를 돌리게 생겼다. 내년에도 무등산 수박 사 먹기는 그른 것 같다. 에잇, 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