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도 남들은 나를 친절한 서영 씨라고 했다.
남들보다 중국생활에 익숙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그런 별명이 생겼다.
본사에서는 내 눈치를 봤지만 나는 형준의 흔적이 있는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가는 것이 좋았다. 한 달 만에 베이징 생활을 정리했다. 십 년을 다닌 베이징 산우회에서 많이 아쉬워했다. 10년 동안 베이징 생활을 풍요롭게 해 줬던 것은 매주 가는 산행이었다. 산행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산우회에 진심이었던 내가 상하이로 가기로 결정하자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갔던 회원들에게 연락 왔다. 2016년 이후, 한국 기업들 상황이 안 좋아지며 상하이로 회사와 사업장을 옮기는 회원들이 점점 늘고 있었다.
서영 씨, 상하이로 온다면서요.
상하이에 대해 여행자 수준의 정보만 있던 내게 먼저 상하이로 간 산우회 회원들은 큰 도움이 되었다.
상하이로 와 처음으로 열린 환영식에서 민혁을 만났다. 베이징에 있을 때, 몇 번 산행에 나오기는 했지만 민혁은 말이 없었다. 내가 로스쿨 다니면서 한마디도 안 하고 조용히 고개 숙이며 다녔던 것처럼 말이 없었다. 남들보다 큰 키는 눈에 띄었다. 나도 민혁도 서로에게 한 번도 말을 하지도 함께 하지도 않았다. 다시 만난 민혁과는 별 말없이 눈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상하이에 옮긴 나는 새로운 집을 얻고 베이징에서 가지고 온 살림과 가재도구를 정리하느라고 정신없었다. 10년 동안 익숙하게 살았던 베이징과 상하이는 달랐다.
베이징은 교민들 90%는 왕징에 모여 살았다. 모여 살면 좋은 점도 있고 불편한 점도 있지만 모든 생활이 왕징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상하이는 베이징에 비해 교민들이 사는 지역도 흩어져 있다. 베이징과 다른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으로 강력한 코로나 방역정책으로 온통 통제천국일 베이징과 달리 상하이는 자유로울지 알았다.
베이징에서는 아파트에서 코로나 감염자가 한 명만 나와도 한 구를 다 봉쇄했는데 상하이에서는 그 아파트만 봉쇄하는 핀셋봉쇄를 해 역시 합리적이라는 생각에 상하이가 좋아지려고 했다.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온 내 선택에 만족해하고 있을 때, 상하이에서 코로나 감염자가 늘고 있다는 소문이 검은 안개처럼 상하이를 덮고 있다. 스멀스멀 코로나 감염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고 있었다. 아파트마다 봉쇄하는 핀셋 봉쇄는 여기저기 상하이에 사는 우리를 찌르고 있었다. 언제 찔려도 아플지 않을 아파트 봉쇄는 내게도 왔다.
아파트 봉쇄 예정을 받아 든 내게 민혁이 전화가 왔다. 자기가 사는 아파트가 봉쇄되어 당장 갈 곳이 없으니 잠시만 있을 수 있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순간,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누구를 가리고 배제할 순간이 아니다. 같이 베이징에서 산에 다녔던 민혁이 곤란하다는 데, 오라고 했다. 회사 차를 타고 통행증을 받기 위해 퇴근하는 길에 민혁을 만나 같이 갔다. 통행증을 받고 나니 긴장이 풀리고 배가 고팠다. 민혁과 같이 편의점에 가서 맥주와 먹을 것을 사 오며 순간 행복했다. 누군가 같이 내 옆에 있어 같이 물건을 사러 간다는 순간이 행복했다.
민혁과 같이 우리 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베이징 이야기와 산 이야기를 하고 제로 코로나 정책에 대해 투덜대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도 살짝 취했다. 정리하며 설거지를 하는 나를 민혁이 등 뒤에서 안았다. 당황했다. 우리 오늘 처음 본 사이나 마찬가지인데... 나도 모르게 나를 안은 민혁의 팔을 풀었다. 이미 헤어졌지만 법적으로 우린 아직 부부였고 민혁도 유부남이었다. 명색이 변호사인 내가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남자하고 어쩌자는 거지..
원래 봉쇄는 2일 뒤에 풀리기로 했다. 얼떨결에 집에 와있게 된 민혁이 불편할까 봐 최대한 배려했다.
2일 정도면 베이징 산우회에서 캠핑 갔다고 생각해도 된다.
단체방에서는 상하이가 봉쇄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무슨 소리야, 어떻게 상하이를 봉쇄해
모두의 반응은 같았다.
상하이는 바다로 나간다는 동사 上海가 도시이름인 명사가 된 도시이다.
상하이를 봉쇄하면 중국을 봉쇄하는 것과 같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온라인에서 떠돌고 있었다. 중국 제로코로나 정책이 3년째 되어가니 별 이상한 소리와 억측이 난무한다.
이미 제로코로나 정책으로 형준과 헤어지고 상하이로 온 내게 제로 코로나 정책이 더 줄 수 있는 피해가 있을까.. 더 아플 것도 잃을 것도 내게, 상하이에 나는 혼자 버려진 것 같았다. 하루만 자고 다음 날 다른 기장 집이나 숙소로 가겠다는 했지만 같이 있는 게 좋았다. 마음속으로 다른 기장 집으로 가지 않기 바랐다. 안다. 민혁은 결혼했고 아내와 자식이 있는 것... 지금 상하이 봉쇄라는 검은 그림자가 크라겐처럼 으르렁 거리며 다가오는 데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고마웠다. 지금까지 혼자 다 알아서 해야 하는 내 삶이 너무 힘들었다.
이런 내 마음을 상하이가 알았을까.. 몰라줘도 되었는데...
이틀 뒤 풀리기로 했던 아파트 봉쇄는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2022년 4월 1일, 상하이 시 전체가 봉쇄되었다. 상하이를 봉쇄하고 군부대를 투입할 거라는 이야기도 단체방에 올라왔다. 지금까지 전혀 서로 다른 인생을 산 민혁과 나는 졸지에 70㎡ 아파트에 갇혔다.
민혁 부모와 가정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처음 함께 한 술자리에서 들었다.
민혁은 장군의 아들이었다. 장군인 아버지와 음대 나온 어머니라는 좋은 가정에서 자랐고 한국에서는 1위 항공사 기장이었고 지금 중국에서 최고 급여와 대우를 받는 기장이었다. 민혁이 받는 월급의 반의 반도 못 받는 그저 그런 평범한 공공기관 현지 파견 변호사인 나와 급이 달랐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든 난 한 부모 출신에 수포자였다.
그저 수학 말고 그나마 다른 영역만 잘해 간신히 인서울 대학에 들어가 과외 아르바이트하며 로스쿨 나왔고 대기업 법무팀이나 대형법무법인에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나마 중국을 알고 중국어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중국 관련 일을 할 수 있다. 내가 사랑한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한 남자를 선택하는 안전한 결혼은 코비드 19에 제로 코로나 정책에 파괴된 나와 민혁은 다른 신분 계급 같았다.
남편 하고도 같이 산 적이 없는 내게 민혁과의 동거는 낯선 도전이었다.
다행인 것 둘 다 많이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텅텅 빈 내 냉장고를 열어본 민혁 눈길에 주눅 들었다. 평소에 나는 냉장고를 꽉 채워 놓고 사는 편이 아니고 저장 공간이 여유 있는 냉장고를 선호했다. 그날그날 사서 정리하거나 며칠 내 소비할 수 있는 만큼 생활하던 내게 상하이 봉쇄는 혹독했다. 혼자서 먹을 게 없는데 민혁도 같이 있었거 최선을 다했다.
얄팍한 내 냉장고에서 꺼낸 재료로 신기하게 두툼한 음식을 만들었다. 나는 안 먹어도 굶어도 민혁은 먹었으면 좋겠고 굶지 않길 바랐다. 우리 둘 다 서로가 더 먹기 바라며 양보하고 음식을 미뤘다. 지금까지 풍족하게 산 적은 없어도 굶어 본 적 없는 내가 식재료가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상하이 항구가 있는 바다에는 물품을 실은 컨테이너선들이 몰려서 입항을 기다리고 있고, 상하이 시 경계에 식료품을 실은 화물트럭이 들어올 수 없어 야채와 고기들이 썩어 버리고 있다고 했다.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상하이에 사는 우리가 먹을 것과 생활 물자를 못 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코미디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게 더 웃겼다.
이 상황에서 민혁보다 나은 것은 나의 중국어였다.단체방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아파트 안 한인들과 교류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혼자 부기장을 데리고 영어로 독립적으로 일하는 보다 중국어로 일하며 평소에도 수많은 고객사를 다뤄 온 내가 나았다. 가장이 된 기분이었다. 최대한 침착하게 상하이 봉쇄 상황을 대처했다. 흙수저 산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구나
나는 고기를 먹기 않지만 민혁을 위해 단백질을 구하고 싶었다. 1월에 베이징에서 먼저 상하이로 내려왔던 사람들과 집에서 간소한 집들이를 했다. 한국식으로 잘 풀리라는 화장지를 사 왔고 비데가 있던 우리 집에 화장지는 충분히 있었다. 아파트 단체방에 올려 화장지를 주고 만두와 햄으로 바꿔왔다.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소꿉놀이를 하는 기분이다.
민혁과 나는 누가 정하지 않았어도 집안일을 분담했다. 낮에는 온라인으로 근무하는 나를 위해 민혁은 작은 방에 있었다. 작은 방에는 책상이 있어 앉아 있을 수 있다. 우리 집에는 소파와 TV가 없다. 앉아 있을 시간 없는 내게 공간 차지하는 소파와 보지도 않는 TV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해 집주인에게 치워 달라고 했다.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지만 상황은 같지 않았다. 중국 제로코로나 방역 정책은 수시로 바뀌었다. 바뀌는 정책을 따라가는 것은 100M 달리기처럼 숨찼다. 하루 24시간 중 23시간은 집안에 있는다. 집안에만 있다 보니 다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겠다며 농담하며 달리기라도 하자고 했다.
6개월마다 메디컬체크를 해야 하는 민혁이 체력 관리를 위해 시도한 가벼운 달리기에 내 발목이 반항했다. 습관적으로 삐던 발목을 잠시 잊고 달리기를 시작했다가 아파트 한 바퀴도 못 뛰어보고 넘어졌다. 넘어진 나를 일으켜주는 사람이 있다. 순간, 한 번도 본 적 없고 만난 적 없고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 보호와 애정을 받아본 적 없는 내게, 나를 일으켜 주고 압박붕대를 빠르고 단단하게 감아주는 민혁의 든든한 손을 잡고 싶었다. 전에 나를 안았던 민혁 팔을 풀어버렸지만 이번에는 내가 그 팔을 잡았다. 내게 의지할 사람이 생긴 것이다. 한 침대에서 처음으로 같이 잤다. 손만 잡고 잤지만 이미 우리는 그날 마음속으로 서로를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