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을 못했다. 못했는지 싫어했는지 수포자였다.
다른 영역 공부는 잘했는데 수리영역이 다 말아먹었다. 부족한 수리영역을 언어, 사탐 영역이 메꿨다. 스카이는 못 갔지만 인서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영역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낸 편향적 뇌구조 덕이다. 문과 중에서도 이과 소질은 전혀 없는 문송이였다. 간신히 인서울로 대학을 간 내 인생에 반전이 생겼다. 대학에 가니 수학을 안 해도 된다. 전공인 행정학 공부도 잘했고 부전공으로 한 법학은 법대생보다 높은 학점을 받아 같이 수업 듣는 법대생들 사이에서 재수 없다 소리 들을 정도로 얄밉게 공부 잘했다. 4학년 때, 대학원을 갈까 취업을 해야 할까 하는 갈림길에서 나를 예뻐한 법대 교수님은 로스쿨을 권유했다. 수학 못 해 스카이 못 간 내 안의 열등감이 로스쿨에 대한 욕망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부모가 변호사이거나 대기업 임원, 교수 등 든든한 뒷배를 가진 간다는 로스쿨에 흙수저인 내가 도전했다. 시험에는 뒷배가 필요 없으니까… 리트 LEET 130점 넘게 받으며 지방대 로스쿨에 무난히 합격했다.
로스쿨 2년 내내, 나는 한마디 말도 안 하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거였다. 매일 자기 차로 등하교 하며 강의와 스터디에만 집중할 수 있는 금수저들 사이에서 남몰래 과외하며 학비를 조달하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한부모 가정이라 사회적 배려 대상으로 학비 50% 감면이 없었으면 로스쿨은 꿈도 못 꾸었을 거다. 생활비는 엄마가 조금씩 보내주는 용돈으로 해결했다. 안 먹고 안 쓰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었다. 법학 공부를 하면 뇌 공간이 넓어지고 시력이 4.0이라도 되는 듯 잘 보였다. 형법보다는 민상법을 좋아했지만 변호사 시험 보는 데 필요한 공부할 정도의 참을성은 있었다. 로스쿨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지만 스카이도 아닌 서울에 있는 대학 간신히 나와 지방대 로스쿨 나온 흙수저인 나를 불러줄 로펌은 없었다.
대학교 다닐 때부터 중국여행을 좋아했고 중국문화와 역사공부를 즐겼다.
남들은 미국에 어학연수 가거나 교환학생 갈 때, 중국 여행과 중국어 공부를 했다. 1/4 비용으로 여행도 가고 공부하기도 좋은 중국이 좋았다. 남들 다 안 하는 중국 공부를 한 내게 열린 길은 중국이었다.
현대자동차가 북경기차와 합작으로 시작한 중국 사업은 본 궤도에 오르며 3 공장 준공까지 했다.
자동차 산업 특성상, 부품사는 제조사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구조다. 중국 관련 사업을 본격화한 1차 벤더회사에서 중국 관련 법률 업무를 담당할 월급 변호사를 모집했다. 월급 500만 원 이외, 정직원들이 받는 주택 임차 보증금, 각종 복지 혜택 하나 없는 연봉 6천만 원짜리 계약직 변호사였다. 대학원 경력 인정해 대리 직급으로 입사해 2년을 일했다. 예전에 변시 통과한 선배들이 임원을 달고 일반 기업체에 스카우트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달나라에서 토끼가 방아 찧을 때 이야기였다.
다달이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적당한 업무에 대우, 내 스펙에 맞는 딱 그만한 자리였다. 베이징에서 근무할 변호사를 모집한다는 공공기관 KCAO공고에 과감히 지원서를 냈다. 그때 다니는 회사에서 형준을 만났다.
형준은 연구원이라 법무팀에서 근무하는 나와 업무 연관성은 없지만 중국 공장 운영에 관련 회의에서 여러 번 스쳤다. 형준은 티 나지 않게 조심스레 내 옆을 맴돌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형준은 기업 오너 창업자 회장의 6촌 조카였다. 직계는 아니지만 혈관에 조금이라도 로열패밀리 피가 흐르는 형준이 싫지 않았다. 형준은 중국을 가겠다는 내 의지를 꺽지 못했다. 월급 500만 원짜리 계약직 변호사로 사느니 중국 가겠다는 내게 형준은 할 말이 없었다. 형준은 결혼하고 가라고 했다. 나는 가족이 필요했다. 혼자 사는 어머니와 산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누군가 내 옆에 있어주고 지켜줄 사람이 생긴다는 게 좋았다. 몇 년 근무하다 다시 한국으로 올 수도 있고 형준이 베이징 연구소로 발령받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형준부모도 우리 결혼을 찬성했다.
변호사 며느리를 싫어하는 시부모는 없다. 사근사근한 나를 좋아했다. 사근사근함은 내가 살아남기 위한 필수무기였다. 서울하고 베이징 하고 비행시간은 2시간이 안 걸린다. 베이징에서 상하이 가는 것보다 서울 가는 게 더 가깝다. 한 달에 한 번씩 내가 가거나 형준이 오기로 했다.
연애생활 같은 결혼생활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이가 생기면 엄마가 베이징으로 오기로 하고 시댁은 육아 비용을 대준다고 했다. 한국 기업들 법률 관련 자문, 소송을 도와주고 중국 경제, 정치를 연구하는 공공기관 KCAO 현지파견 변호사로 베이징 땅을 밟았다. 대학과 로스쿨을 다니는 동안 여행으로 오고 가던 베이징에 바리바리 짐 싸 들고 살러 오게 될지는 엄마도 구글도 네이버도 몰랐다.
대기업 주재원이 아니라 몇 만 위안씩 하는 좋은 아파트에서 살지 못했지만 깔끔하고 작은 집 임대료를 낼 정도는 되었다. 공공기관답게 휴가는 잘 보장되었고 한국에서처럼 법정에 출두할 일도 없다.
방송출연하거나 유튜브를 하는 유명 변호사처럼 화려한 삶은 아니어도 내가 좋아하는 중국에서 적당한 수입과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는 환경은 좋았다.
여기서는 나를 둘러싼 모든 굴레와 선입견이 없었다. 지방대 로스쿨을 나온 것도 홀 어머니가 혼자 키운 것도 아무도 물어보지도 않았고 알지 못했다. 내가 변호사라는 것과 현대차 벤더 중에서도 제일 큰 1차 벤더사 오너 일가(비록 6촌이지만)의 며느리라는 것만 봤다. 흙수저인 내가 은수저로 살 수 있던 시간이었다. 2019년 11월 전까지…
몇 년 만 근무하려고 했던 베이징 사무소 포지션은 붙박이가 되었다. 베이징 공기 오염이 심했고 경제 발전 속도에 맞춰 물가, 인건비가 오르며 중국 생활은 1992년 한중 수교 직후 싼 인건비와 물가로 호위호식하던 시절은 끝났다. 2016년 사드 배치 문제가 불거지며 봄날 같던 한중 관계는 겨울왕국처럼 얼어붙었다. 한국 기업들 철수가 시작되었고 중국 시장에서 한국 기업 점유율은 급속도로 떨어졌다. 본사 소속 변호사 중에서 혹시 중국으로 보낼까 봐 중국어를 할 수 있는데도 모르는 척한다는 소문마저 들려오며 아무도 중국으로 오려고 하지 않았다. 서울과 베이징을 오고 가며 유지하던 우리 결혼 생활은 코로나가 갈라놓았다.
2019년 11월 우한에서 시작된 정체와 이름 모를 폐렴은 중국이 중국을 봉쇄하게 했다.
2020년 춘절에 한국에 가서 형준과 엄마를 만나고 베이징으로 돌아온 것이 우리 마지막이었다. 한국도 중국도 해외 입국자 격리를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한국과 중국을 오고 가던 우리 부부는 더 이상 오고 갈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미안했다.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아 미안해했고 많이 울었다. 형준도 처음에는 이해한다고 했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갔다. 봄이 오고 또 봄이 왔지만 중국 제로 코로나 정책은 건설현장에 부어놓은 레미콘처럼 견고하게 굳어갔다. 이제 우리가 한국과 중국을 오고 갈 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나를 좋아했던 형준을 선택했던 이기심은 이제 멈춰야 했다. 형준에게 이제 나를 떠나라고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 나는 한국에 갈 수도 형준이 중국에 올 수도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 만나 행복하라고 간신히 입을 뗐다. 법률적으로 우린 부부였지만 이미 형준과 나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똑같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세계에 살지만 내가 사는 세계는 또 다른 세계였다. 다 포기하고 퇴사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중국에서 산 시간을 버릴 수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
형준과 이별을 결심하고 나니 그와 함께 했던 공간과 시간을 바꾸고 싶었다. 내가 베이징에서 사는 10년 동안 형준은 매달 중국에 왔고 같이 밥 먹고 마트도 가고 산책도 했었다. 베이징 왕징 구석구석 묻어 있는 형준과의 추억과 흔적에서 떠나고 싶었다.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경직된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옮기는 대기업과 중소기업들이 늘어났다. 다들 중국 사업을 축소하면서 상하이만 남기거나 베이징을 정리해 상하이로 옮겼다. 본사에서도 베이징 사무소를 최소화해 중국인력만 남기고 한국인력은 상하이로 옮기겠다고 했다.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본사에 속으로 흔쾌히 겉으로 작은 목소리로 갈게요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