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나 Oct 23. 2024

1부 6편-하얀 밤

 3년 내내 시설격리를 했던 호텔 앞에 다시 섰다.

아파트 봉쇄감옥에서 시설격리감옥으로 장소만 이동했다. 호텔 입구는 소독약 하얀 얼룩에 절어 있다. 내 폐 속까지 소독약에 절여지는 기분이다. 코로나 검사 후, 방으로 갔다. 같은 호텔이지만 매번 다른 방이 배정된다. 서영아파트 안에서 갇혀 있거나 회사 호텔에서 갇혀 있거나 갇혀 있는 내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차이는 서영이 있고 없다. 하루 뒤 비행 가야 하니 일단 씻고 자려고 했다. 가방을 여니, 진라면 한 개가 들어있다.


 서영 집에 라면이 3개 있었다. 2개는 우리가 끊여 나눠 먹었고 1개는 비상용으로 아끼고 안 먹었다. 일주일마다 상하이 시에서 주는 구호품이 나오고 중간에 회사에서 식품을 구해줘 보내주기도 했지만 항상 비상용으로 남겨 놔야 했다. 그 하나 남은 라면을 서영이 내 가방에 넣은 것이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서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도착했고, 여기 숙소 상황 좋고 먹을 것도 많다고 했다.

안 그러면, 걱정할 테니..


한국에 있는 아내보다 상하이에 있는 서영에게 먼저 문자 보내는 내게 놀란다.


 비행할 수 있는 컨디션을 만들어야 한다.

가벼운 운동도 하고 회사에서 주는 중국식 도시락도 먹었다. 봉쇄 중이라 재료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회사도시락도 고기반찬 하나, 채소 반찬 하나와 밥이다. 이 정도 도시락이라도 감사해야 한다. 비행 전 브리핑도 온라인으로 했다. 화물기라 승무원은 탑승하지 않아 그나마 브리핑이 수월하다. 푸동공항으로 가는 길이다. 도시는 텅 비어있다. 늘 차량이 물처럼 흘러 다녔던 상하이는 돌처럼 굳어 있다.


 도로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통행증과 코로나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상하이는 제로코로나를 위해 어떠한 짓도 가능한 상황이다. 푸동공항 활주로는 텅 비었다. 다른 나라 관제는 1분에 1대 정도 이착륙을 시키는데 중국은 항상 관제 간격이 길어 시간과 공간을 낭비한다고 투털 댔다. 칵핏에 앉는다. 43일 만이다. 이착륙하는 비행기가 없으니 이륙허가가 금방 떨어진다. 활주로 택시 후, 조종간을 당기며 비행을 시작했다. 수없는 이착륙을 했지만 이번 이륙은 조금 더 특별하다. 봉쇄된 상하이를 잠시나마 떠난다. 서영을 두고


 헬싱키까지는 11시간 걸린다. 전반 비행은 내가 하고 중간에 중국인 기장과 교체했다. 승객 좌석에 가 누우니 졸음이 쏟아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다른 나라 비행기는 러시아영공을 지나다닐 수 없지만 중국 비행기들은 러시아영공을 지나갈 수 있다. 헬싱키 공항에 내려 회사 지정 호텔로 갔다. 헬싱키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구속하지 않는다. 코로나 검사를 요구하지도 소독약을 뿌려대지도 않는다. 불과 11시간 만에 나는 같은 지구, 완전히 다른 곳으로 왔다. 별을 바꾼 것도 아닌데.. 소독약도 하얀 방역복을 입은 유령 같은 방역요원도 없는 호텔 방에 들어가니 허탈함과 피로감이 나를 누른다. 백야다.   


 저녁 9시이지만 아직 해가 떠 있어 잠이 오지 않는다. 샤워 후 호텔 밖으로 나갔다. 회사에서는 비행 목적지에 가면 호텔에서만 머무르라고 하지만 유럽이나 미국 쪽으로 가면 회사 통제가 거의 미치지 않는다. 공항 주변 호텔이라 작은 동네이다. 동네만 걸어도 기분이 좋다. 자유롭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서영에게 잘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혼자서 어떻게 하고 있을까, 마음 한편에 가시가 박힌 듯 불편하고 아프다.공기마저도 자유롭다는 느낌을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알까?


 멜라토닌 하나 먹고 자야겠다. 서영 없이 혼자 잠드는 밤이다. 새벽에 깜짝 놀라 깼다. 지금 자고 있는 곳이 어디지.. 혼란스러웠다. 이틀 전 난 서영 집에 있었고 간신히 전기가 다시 들어왔고 회사 전화를 받고 오니 서영은 울고 있었고 나는 서영을 안았다.  아파트에서 나와 회사 숙소로 갔다 어제 푸동공항에서 헬싱키로 온 것이었다 술 마시고 난 후, 블랙아웃 현상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기억을 더듬더듬 찾았다.


 오늘 하루는 쉬는 날이다. 이른 아침, 마을은 조용했다. 동네 작은 빵집 겸 슈퍼가 문을 열고 있었다. 천천히 오픈 준비를 하는 늙은 주인 뒤로 갓 구워져 나온 호밀빵이 방긋방긋 통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오래간만에 만들어놓은 게 아니라 바로 만들어진 빵을 언제 봤는지 모르겠다. 홀리는 듯,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휘바아 후오멘따 Hyvää huomenta,


 핀란드어로 아침 인사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서영에게 이 빵을 가져다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호밀빵은 오래 보관 가능하니 혹시 전해줄 수 있을까 두 덩이를 사고 경성치즈인 에멘탈과 올리브도 샀다. 서영 눈물을 닦아주며 휴지가 부족할까 순간 생각했던 씁쓸함에 휴지도 샀다. 헬싱키에서 나는 잠시라도 자유롭다. 소독약 냄새나지 않는 공기와 철조망 펜스가 처지지 않는 거리에서 나는 그동안 억눌린 자유를 찾아 혼자 골목골목마다 걸어 다녔다. 호텔로 돌아와 호밀빵과 치즈,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봉쇄 기간 내내, 남아있는 먹거리 체크하고 서영이 먹을 게 혹시 부족하지 않을까, 늘 신경 쓰며 먹었던 음식을 지금 이 순간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것에 해방감을 느꼈다. 48시간 레이오버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는 다시 봉쇄된 상하이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지만 서영에게 갈 수 없다. 해외 입국자 14일 격리를 해야 하고 그 격리가 끝날 때까지 상하이 봉쇄가 풀리지 않으면 회사 격리숙소에서 나가라고 해도 못 나간다. 숨 쉬는 공기마저 자유로운 이곳을 떠나 봉쇄감옥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아니, 비행기를 타고 가지…


 정해진 일정에 맞춰 헬싱키 반타공항을 떠나 상하이 푸동공항으로 갔다. 떠나올 때, 설레던 기분은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축 쳐져 자꾸 나를 공중에서 땅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다. 상하이 하늘이 보이자 벌써 소독약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을 막겠다고 47일째 봉쇄 중인 상하이와 3년째 해외 입국자 격리 장막을 친 중국이 보인다. 봉쇄와 핵산검사 무한반복 속으로 착륙했다.


 격리시설에 들어가 메신저를 열었다. 서영이에게 온 메시지가 있는지 봤다. 아내보다 서영에게 온 메시지를 먼저 찾는 나를 욕할 생각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게 서영이 더 애틋하다.


 시차적응도 해야 하고 피로에 지쳐 잠이 든다.

옆에 서영이 누워있다. 언제나처럼 말없이 내 엄지 손가락을 가볍게 잡고 있다. 팔 베개 해주니 몸을 옆으로 돌려 내게 안긴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었다. 피곤하니 자라는 말에 괜찮아하며 서영 입술에 키스를 하고 안았다. 지금까지 안았던 것보다 더 깊게 서영을 안았다. 불안한  상황에 흔들리는 마음을 서영에게 털어놓기라도 하듯 강한 애무를 했다. 서영은 아파하는 듯했지만 내게 안기며 천천히 내 등을 감싸 안았다. 긴 애무 끝에 우리 둘 다 처음으로 동시에 절정을 맞이했다. 몸이 툭 떨어지는 것 같이 서영 위에서 내려와 옆에 누웠다.


핵산검사받으라는 문 두들기는 소리에 눈을 뜨고 보니 나는 서영 아파트가 아니라 회사 격리시설에 있다. 서영 아파트에서 나와 헬싱키에 화물기 몰고 갔다 오늘 돌아왔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서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보고 싶다


 서영은 혼자 아파트 안에서 잘 먹고 자고 있다고 답변했다.

구호품 양은 같은데 먹는 사람이 한 명이라 많이 남는다고 농담한다. 구호품양이 부족해도, 먹을 것 없어도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우리 둘 다 같은데 그럴 수 없다. 코로나 발생 이후,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죽지 않은 것만이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상하이 물류가 좋아졌는지 헬싱키로 떠나기 전보다 야채와 고기 종류가 하나씩 더 넣은 도시락이 나왔다.

 물류가 된다면 서영에게 호밀빵과 치즈를 보내주고 싶었다. 와인도 여러 병 사와 한 병 같이 보내고 싶다. 이럴 때,  관시의 힘을 빌려야 한다. 중국 부기장에게 메시지로 연락했다. 친구에게 먹을 것을 좀 보내주고 싶다고 했다. 아직 PM(Pilot Monitoring)이 미덥지 않아 이착륙 권한을 주지 않았던 부기장은 이럴 때는 내 편이 되어준다. 알아보겠다고 했다. 원래 격리시설에서 외부로 물건을 내보낼 수 없다. 매슬로우의 망치다. 모든 것이 코로나 바이러스로만 본다.

 부기장에게 연락이 왔다. 쓰레기인 척하고 봉투에 주소와 빵을 싸 문 밖에 내놓으면 직원이 쓰레기 가져가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보내주기로 했다고  담즙이 역류한 듯, 입맛이 씁쓸하다. 서영에게 줄 음식을 쓰레기인척 해서 보내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보낼 수 있으면 씁쓸함을 참기로 했다. 헬싱키에서 싸 온 봉투에 호밀빵, 치즈, 와인을 넣고 쓰레기 수거용 비닐봉지를 여러 개 씌우고 주소를 적었다. 작은 쪽지도 하나 넣었다.


잘 챙겨 먹고 잘 자고 버티라고…


 서영에게 이런 방식으로 음식을 보내 미안하다고 문자 했다. 봉쇄 끝나면 정말 좋은 레스토랑 가서 제대로 맛있게 식사하자고 했다. 상하이에는 미슐랭 스타를 받은 파인다이닝 레스토랑부터 황푸강 멋진 야경을 즐길 수 있는 식당은 널리고 널렸다. 그날이 올 지, 우리 둘 다 기대하지는 않고 있지만.

 헬싱키에서 사 온 빵, 과자, 치즈로 중간중간 먹으니 매일 먹는 중국식 도시락이 덜 지겹다. 봉쇄되어 보니 기름절은 도시락도 귀하다는 것을 이제 안다. 시설 격리 생활은 3년 내내 했다. 군대도 3년 안 가는 데, 중국 해외입국자 격리로 인한 시설격리를 3년도 넘게 하고 내게 내가 신기했다. 14일이다. 내가 이 안에서 버텨야 하는 시간, 예전에는 14일이면 시설격리를 마치고 나갈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14일을 센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이 곁에서 내 영혼을 사각사각 갉아먹으며 지나간다.


 밥은 먹고 있지만 서영에게 미안했다. 서영에게 연락하면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다. 한 사람이라도 식사 걱정 안 하니 다행이라고 하면 늘 친절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파트 안 상황이 좋아져 공동구매도 하고 징동하고 타오바오에서 물건도 시키면 어느 정도 온다고 했다. 보내준 빵, 치즈, 와인 잘 받았다고 했다. 구입가는 30유로도 안 되는데 심부름 비용으로 300위안 지불했지만 아깝지 않다. 우리 둘 다 봉쇄에 지쳐가고 말라가고 시들어가지만 서로에게 괜찮다고 하고 있다. 괜찮다고 하지만 괜찮치 않은 상황 속에서 상하이는 초여름으로 넘어가고 있다.


 14일이 끝나가고 있지만 내게 희망은 기대도 없다. 그저 주는 밥 먹고 근육이 줄어들지 않기 위해 방 안에서 운동하며 버티고 있다. 다시 비행 스케줄이 나왔다고 한다. 한국이라는 말에 가슴 심박이 자동으로 올라간다. 한국에, 집에 못 갔다 온 지 3년도 넘어간다. 한국을 간다고 해도 집에 갈 수도 가족을 만날 수도 없다는 것도 알면서도 한국이라는 말에 비행한다고 했다. 봉쇄한 지 두 달이 가까워오고 있다.


 한국 가는 비행기는 정규 편이 아니라 전세기라 난징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힌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난징-인천 운항 스케줄을 받아들였다. 비행과 시설격리 왕복셔틀 인생이다. 가족도 서영도 만날 수 없고 격리시설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비행기 조정뿐이다.


 회사 차로 난징으로 갔다. 상하이 봉쇄 이후, 상하이를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떠나라고 했다. 농민공들은 많이 돌아갔다고 한다. 돌아갈 곳이 있는 농민공들마저 부러워하는 내게 너도 떠나면 되잖아 하는 편한 소리를 누가 내게 할 수 있을까?

  다른 항공사에 있던 기장들은 계약해지로 한국으로 돌아가 집에서 놀고 있다. 기장들이 항공사 골라 여기저기 이직하던 선택권은 코로나가 가져갔다.

 전세기를 몰고 인천공항에 내렸다. 한국도 정상화 많이 되어 다른 나라 항공기들이 주기장에 많다. 한때, 내가 운항했던 항공사 비행기를 보니 그립기도 하다. 공항 땅이라도 한국 땅 밟아보니 뭉클하다. 아내에게 통화하고 나니 기분이 더 우울하다. 3년 만에 한국에 왔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 점검하는 거였다.

  난징에서 출발할 때는 만석이 있었지만 돌아가는 비행기에는 승객이 없다. 아무도 중국으로 가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렇게 확인한다. 이륙 후, 순항고도에 이르자 랜딩기어를 올리고 오토 파일럿을 켰다. 돌아가는 길, 분당 하늘이 보인다. 서영은 한국에서 분당에 산다고 했다. 사진을 찍었다. 상하이에 가서 서영에게 한국 집 하늘이라도 보라고 보여주고 싶었다. 난징에서 내렸다가 다시 비행기를 가지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격리시설로 돌아왔다. 언제 나는 비행기에서 내려 소독약이 구름처럼 피어 있는 격리시설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서영에게 한국 집 분당하늘 사진을 보내주었다. 답이 없다. 전화를 해도 문자를 해도 답이 없다. 불안하다. 연락해 볼 다른 사람이 없다는 답답함과 불안감이 엉겨붙는다. 내가 아는 것은 서영 한국 본사 이름뿐이다. 연락이 되지 않는 서영에 대한 불안과 걱정에 식욕도 없어진다. 화를 내거나 소리 질러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상하이 봉쇄가 5월 말에는 풀릴 거라는 소식은 귀에 들어오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음 주 한국 비행은 다른 기장이 가고 헬싱키 화물기비행이 배정되었다. 한국 땅이라고 공항 땅에 발만 디디고 오는 한국 비행보다 2일 레이오버 스테이가 주어지는 헬싱키가 낫다. 헬싱키비행을 가기로 하고 비행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도 연락이 안 되는 서영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모래주머니처럼 붙어 나를 무겁게 했다.

 20일 만에 돌아온 헬싱키 공기는 언제나 깨끗했다. 더워지는 상하이에 있다 헬싱키 선선한 공기를 마시니 좋다. 2일 동안 헬싱키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봉쇄에 지쳐 검어진 것 같은 마음 그을음을 닦아낼 수 있었다. 찌든 마음 그을음은 닦았지만 서영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덕지덕지 붙어 있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 부기장에게 상하이에서 감염자들을 집단수용시설로 끌고 가는 숫자가 급격히 늘어 수용 한계를 초과했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추가수용을 위해 상해 근처에 또 다른 집단수용시설을 짓고 있다고 했다. 이보다 더 어리석을 수 있을까? 나도 감염되면 언제든지 끌고 갈 것이다.

 

 이송 버스에서 내려 교도소로 들어가는 죄수처럼 우리는 공항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고 회사 격리 시설로 갔다. 구베이에 있는 내 집은 이제 어떻게 생겼는지 구조도 기억 안 나려 한다. 42일 동안 살았던 서영 아파트 구조는  3D 화면처럼 또렷한데... 20년을 같이 산 아내보다 42일 같이 있던 서영이 더 걱정되고 안타깝다.

누가 내게 돌과 창을 던져도 괜찮다.

더 이상 아플 것도 고통스러울 것도 없다.

 이번에도 사 온 빵과 치즈, 피클, 와인에 면세점에서 산 초콜릿도 같이 넣어 서영에게 보내고 싶었다. 한번  하기가 어렵지 두 번하기는 쉽다. 부기장에게 부탁했고 물건을 잘 가져갔다고 하는데 전달은 잘 되었을지 모르겠다.

  베이징에서 함께 알고 지내던 사람들 몇몇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았던 문자이지만 서영 안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전 작업이 필요했다. 이런저런 답장이 왔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자연스러운 유도에 다른 기장(평소에는 스타일이 안 맞아 싫어했던 기장)이 뜻밖에 빠른 답장을 해왔다. 무척 고맙고 반가웠다. 지금 만나면 악수라도 먼저 청할 판이다.


서영 씨 알죠?  KCAO 다니는

네 알죠, 우리 베이징에서 같이 산에 다녔잖아요.


감염자 수용 시설로 끌려갔다고 했다.


처음엔 문자가 오더니 이제 문자가 안 와요.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 영사관에 좀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자기네들도 봉쇄되어 있다고 해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고 하네요.


그랬구나, 팡창으로 끌려갔구나 그래서 연락이 안 되었구나… 방문을 쳐다보았다.

지금 심정 같아 저 방문을 나가 서영에게 가고 싶다. 1층 건물 입구도 못 나갈 거라는 알면서도 방문을 쳐다보며 움켜즨 주먹 안으로 땀이 흘러나왔다. 방울방울 내 피부를 타고 흐르며 슬픔과 분노를 운반한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잘 수도 없는 상태에서 하루를 보냈다. 불안과 걱정이 내 식욕과 잠을 거둬가는 봉쇄 두 달이 넘어가는 밤이었다.


 누구에게도 서영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나날이 지나갔다. 서영 한국 본사에 전화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제 6월로 봉쇄가 넘어간다는 소문에 여기저기 회사와 기장들 단체방이 시끄러웠다. 헬싱키 백야가 생각난다. 밤 10시가 넘어도 하얀 밤.. 그 하얀 밤 속에서 6월이 왔다. 얼핏, 잠들었을까..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은 자고 먹어야 한다는 생물이라는 것이 서글프다. 부기장과 스케줄러에게 전화가 와 있다. 상하이 봉쇄가 끝났다고.. 지금까지 상하이를 감싸고 봉쇄라는 거대한 에어돔이 걷혔다.  


 머릿속은 더 하얘졌다. 지금 뭘 해야 하지.. 서영에게 가고 싶었다. 회사에 지금 격리시설에서 나가고 싶다고 했더니 그새 비행이 배정되었다고 한다. 봉쇄 풀리자마자 유럽으로 돌아가려는 항공 수요에 브뤼셀까지 가는 전세기를 긴급 편성했다고 했다. 자는 둥 마는 둥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여유롭던 내 스케줄을 왜 이렇게 빡빡하게 넣은 것인지 짜증이 나는 순간 서영에게 메시지가 왔다. 지금 팡창에서 나와 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작았다. 문자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래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집으로 가 있어요.

집으로 올 수 있나요.

지금 막 비행이 잡혀서요.

그래요. 비행 가셔야죠.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서영이 맥이 빠졌을 거라는 안다.

봉쇄가 끝났는데 나는 서영에게가 아닌 브뤼셀로 가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