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축구리그의 명장 '무리뉴' 감독이 자기 팀의 젊은 선수를 감독 사무실로 따로 불러 조언을 하는 영상이 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곧 환갑인데, 당장 어제만 해도 20대 같았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내가 보기에, 너는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다.
너는 스스로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 감독인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너를 위해서이다.
내 말은, 네가 매 경기마다 골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네가 매 경기마다 'Man of the match' 가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다만, 자기에게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에게는 시간이 없다.
나는 24시간 365일 어느 정도 괴로워하고 있다. 직시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그렇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똑바로 마주하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고통을 정면으로 받아내려고 한다.
이것은 지능적인 선택이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걸 최대한 빨리 해결하는 것이 지능적인 선택이다. 빨리 해결하려면,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하니 고통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게 당연하다.
그런 고통들에 익숙해지면 점점 자기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어떤 부분에서 가장 큰 통점을 가졌는지를 알게 된다. 어떠한 필요를 가장 많이 느끼는지 또는 거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런 자각은 여러 가지 고통을 적극적으로 감내할수록, 명확해진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엣지'가 생긴다.
특정한 곳에 집중하기 시작하며, 그와 관련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자동으로 관심을 접게 된다.
거기서 괄목할만한 발전이 생긴다. 그 괄목할만한 발전이 지속적으로 쌓이면, 성공과 승리가 온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과 승리라는 것은 정신적 자위질을 말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변화와 발전, 풍요와 결과물(충분한 돈과 사회적 명예 & 지위), 고통을 피하지 않고 감내한다는 자부심이 내가 말하는 성공과 승리이다.
정신적 자위질은 속임수이다. 이건 선한 것도, 도덕적으로 추천할 만 것도 아니다. 사람의 귀중한 시간과 생명력을 좀먹게 하는 악한 행위이다. 이런 자위질에 빠진 사람들은 평생의 시간을 낭비하고, 뒤늦게 깨닫는다.
뒤늦게 세상이 무너진다. 더 이상 청춘이 돌아오지 못함을 깨닫는 나이가 되면, 자기 속에서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남에게도, 세상에게도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그래서 '조세 무리뉴' 감독이 젊은 선수에게 저렇게 말한 것이다.
너는 이대로 살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해야 한다고.
철학자이자 시인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재림'이라는 시가 있다.
소용돌이처럼 원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매는 조련사의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중심은 지탱할 수 없다.
무질서만이 세상을 뒤덮어 가고,
피에 물든 물결은 넘쳐나, 어디서나
순수한 의례를 함몰시킨다.
가장 선한 자들은 신념을 잃어가고,
가장 악한 자들은 격렬한 열정에 차 있다.
분명 어떤 계시가 가까운 것이다.
분명 재림이 다가오고 있다.
재림! 이 말이 나오자마자
현 세계의 정신에서 나온 거대한 형상이
내 시야를 어지럽힌다. 모래사막 어디에선가
사자 몸에 사람 머리를 한 괴물이,
태양처럼 텅 비고 비정한 눈으로 노려보며,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주위 사막엔
격노한 새들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춤춘다.
어둠이 다시 내린다. 하지만 난 이제 안다,
이천 연간의 바위 같은 잠이
흔들리는 요람 때문에 악몽이 되고 있음을,
어떤 거친 짐승이, 마침내 자기 때가 돌아와,
탄생을 위해 베들레헴으로 더딘 걸음을 내딛고 있는가?
나는 이 시가 삶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았을 때, 징벌로 주어지는 악재들을 잘 표현했다고 본다.
평소에 내가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것들을 내 삶에서 추방시키기 위해 목숨이 달린 것처럼 격하게 방법을 찾는 편이다. 그래서 혼자 담배를 태우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가 많다. 어쩔 때는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깨기도 한다.
그만큼 진심이다. 해결책을 가능한 한 빨리 찾고, 지체 없이 행동하려고 하는 의지가 강하다.
나는 유년기 때, 내 부모를 통해 보았다. 게으름, 도망치려는 습관, 덮어두려는 습관, 변명, 외면하려는 자세, 남 탓 세상 탓하는 습관이 십 년 이십 년을 두고 어떠한 재앙을 불러들이는지.
과거에는 어떠한 믿음이 있었다. 누구나 노력하면 이런 자세로 삶을 살아갈 수 있겠거니.
서른이고 곧 서른 하나가 되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이 없어졌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세상의 결과치가 유의미하다. 세상에는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는 사람보다 많다.
나는 이런 삶의 자세가 가장 또는 장남 또는 장녀들에게 필요하다고 한다. 또는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 사람들이 지녀야 할 자세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이 역할을 할 때, 공동체는 발전할 수 있고 적어도 불상사들이 예방된다.
가능하면 저런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 안에 많이 자리할수록 좋다. 가능하면 저렇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 안에 없을수록 좋다. 남녀노소를 떠나서,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어딘가 엄청나게 골몰해 보이는 사람 또는 그야말로 아주 순수한 사람을 좋아한다. 애매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으며, 멀리한다.
골몰해 보이는 사람은 그만큼의 무게를 타인을 위해서 자진하여 지고 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어서 그렇다. 마음이 기특하고 좋아지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사람들은 약속을 지킨다. 매사 책임감을 가지고 임한다. 후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아주 순수한 사람은, 나 같은 사람에게 좋은 명분을 주기 때문에 좋아한다. 내가 희생하여 보호하고 제공해 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여자를 만나면, 저런 여자를 만난다. 나머지는 내 지능을 소모하고 생명력을 산화시킬 만큼의 가치를 못 느낀다.
철학적인 취향이다. 멍멍이를 좋아하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도 똑같은 맥락이다. 내가 유일하게 무장해제가 되는 때가 멍멍이, 어린아이들 앞에서 이다.
페미니스트, 걸크러쉬, 하드 리버럴은 내 취향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관찰하기에 가치가 높은, 지능이 높은 남성들은 저들에게 매력을 못 느낀다. 매사 알아서들 하겠다는 사람들이라, 삶을 동반할 명분이 없다.
책임감과 지적능력이 있는, 강한 남자들은 가치있는 명분과 자신을 향한 존경심을 필요로 한다.
아내나 애인에게 군림하여 폭정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Worth having' 을 하여 명예의식을 가지고 잘 돌보겠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내 신체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저런 건 찌찌, 궁둥이, 얼굴이랑은 크게 관련이 없다.
나같은 남자에게는 'Worth having'이 꼭 필요하다.
지금 빨리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
하루종일 고민을 해도 당장에 활로를 못찾겠다. 2년 정도 노력을 가하면, 해결할 수는 있는 문제이다. 그 소요시간을 단축시키고 싶은 것인데, 수가 안나온다.
2년은 수학적 계산을 통해 나온 계산값이다. 어림잡아 두루뭉술 생각해본 문제가 아니다. 내가 영위하고 있는 투자, 장사 활동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그래서 괴롭다.
숫자는 거짓말을 못하니까.
그래서 지금 당장 10Km 뛰러 나갈거다. 기온이 낮아서 무릎이 또 고장나겠지만, 그래도 가야겠다.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해야한다.
Nujabes - Aruarian Dance
https://www.youtube.com/watch?v=F7vTH72Mst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