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학원에서 선생님으로 일한 지 3년쯤 되던 시기였다. 3년이라는 시간은 나와 아이들 마음속에 켜켜이 애정이 쌓인 시간이었다. 그 애정은 아이들과 주고받는 말놀이에도 있었고 그림을 봐주며 발전하는 아이의 야무진 손끝에도 있었다. 때로는 으름장을 놓기도 했지만, 거기에도 애정은 있었다.
‘그림을 그리려 왔으면 그림을 그려야지. 그렇게 웃고 떠들고만 있을 거야!’
어떤 날은 부드럽게, 어느 날은 재미있게, 때로는 태풍처럼 말했다. 나의 태풍 소리가 어떤 아이들에게 일시적인 효과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내 수업을 들었던 A의 눈에는 그런 내 모습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나 보다.
“선생님 그거 알아요? 선생님 뽀로로 닮았어요!”
“뽀로로?”
“그렇게 생각한 지 조금 됐는데 이제 말하는 거예요.”
“이 타이밍에?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도 아니고 뽀로로?”
같이 수업을 하던 아이들이 듣고 있다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말 안 들으면 선생님 화내다가 결국에는 삐지잖아요.”
“그거야, 너희들이 그림을 많이 그리고 갔으면 좋겠으니까 그렇지. 삐진 척이라도 해야지 너희가 선생님 또 삐쳤다. 하면서 그림 그리잖아.”
“앗, 알았어요. 열심히 할게요.”
난 이 대답에 조금 심쿵했다. 무심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열심히 할 거지?”
“네. 그리고 선생님은 안경 쓰셨으니까 안뽀예요. 안경 쓴 뽀로로요.”
“안뽀? 오! 그거 좋은데.”
안뽀라는 별명을 듣는 순간 진짜 기분이 좋았다. 별명을 지어준다는 건 그만큼 애정과 관심이 있다는 거니까. 선생님의 잔소리하는 모습이 헐크가 아니라 뽀로로로 보였다면 그건 정말 사랑 아닐까? ^^
나는 A를 향해 찡긋 웃었다. 그런 나를 보고 A가 말했다.
“선생님 그렇게 웃지 마요. 느끼해요.”
우리는 또 A의 말에 한바탕 웃었다.
“이제 앞으로 선생님을 안뽀 선생님으로 부르면 되겠다.”
안뽀라는 별명을 듣자마자 제일 크게 환호하던 B가 안뽀라는 별명을 선언하듯 말했다. 다른 아이들도 하나같이 ‘좋아.’라고 말해줬다.
별명이 생겼을 때 아이들과 많이 가까워졌다는 기쁨이 제일 컸다.
아이들이 미술을 할 때만큼은 내가 진짜 뽀로로가 되어 아이들과 ‘노는 게 제일 좋아!’처럼 ‘그림이 제일 좋아!’ 혹은 ’ 그림 그리는 시간이 제일 재밌어.’라고 생각 들게 미술 수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뽀라는 별명이 나에게 기분 좋은 책임감을 덤으로 안겨준 것이다.
나는 그때 아이들이 지어준 별명으로 지금 2년 넘게 ‘안뽀 선생님’으로 불리며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이제 우리 반 아이들뿐 아니라 안뽀는 옆 반 친구들, 동생 친구들도 익숙한 별명이 되었다. 지금도 아이들이 ‘안뽀? 안경 쓴 뽀로로?’라고 재잘거리는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
공부에 지친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면서도 힘들어서 한숨을 푹푹 쉬면 마음이 안 좋다. 이 시간만이라도 긴장도 풀고 웃기도 하면서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 학원이지만 또 학원 아닌 자신만의 아트 공작소 같은, 공간이었으면.
미술만큼은 성적을 매기는 과목으로만 존재하지 않길 바라본다. 미술이 우리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동안 힘들고 지칠 때 아이들의 마음을 쉬게 해 줄 수 있는 쉼터의 역할을 해주길 또 바라본다. 그 옆에 안뽀 선생님이 늘 함께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