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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휘 Mar 15. 2024

봄을 여는 서막

봄 : 타샤의 정원

봄이 오고 있다.

따뜻한 햇살 속에서 문득 옥상 텃밭이 궁금해졌다.

겨우내 한 번도 찾지 않았지만 옥상 텃밭의 모습은 대충 알고 있다. 늘 그 모습이었으니까.

'아마도 수선화가 피어있겠지. 앵두나무에는 꽃망울이 맺혀있을 거야'


한 동안 매 해마다 3월이 되면 텃밭 가꾸기 준비를 했었다.

죽은 풀들을 뽑아내고 흙을 고르게 하고 돌들을 주워 한쪽으로 밀어 넣느라 땀을 흘리기도 했다.

슬슬 시작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옥상문을 열면 마주 보이는 텃밭에서 단연 눈에 띄게 빛나는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노란 수선화가 언제나 그렇듯이 나를 가장 먼저 반겨주곤 한다.

마치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듯이 당당하게 아주 거침없이 나를 보고 있다.

그 모습을 보기 전엔 황량하기만 할 텃밭을 생각하며 고된 노동만 떠올린다.

그러다 수선화를 보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곧장 텃밭을 향해 돌진한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언제부터 피어있었는지 알 수 없기에 그간 목이 마르진 않았는지 요즘 비도 안 왔는데... 하면서 호스의 물부터 튼다.

촉촉하게 젖은 수선화는 마치 길고양이에게 밥을 준 것 같은 뿌듯함을 나에게 도로 돌려주며 "네가 나에게 물을 주었으니 이제 들어와도 돼"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감하게 수선화의 영역을 침범하곤 했었다.


몇 년 동안 텃밭을 가꾸지 않았다.

심지어 작년 봄엔 수선화도 보러 가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는, 문득 책상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마법을 부린 것처럼 나도 모르게 이끌려 올라간 옥상에

언제나 그랬듯이 수선화가 인사한다.

"안녕? 나를 잊은 게 아니었구나. 나를 잊지 말아 줘."라고 말하는 것처럼 유난히 수선화의 모습이 처연해 보인다.

"미안해,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많이 외로웠니? "

황량하고 삭막해 보이는 진한 흙색 텃밭에 왠지 노란 수선화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생명이라고는 개미뿐이었을 테니, 수선화 입장에서 본다면 낯선 이국땅보다 더 낯설지도 모를 망가진 자신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올해는 다시 텃밭을 꾸며볼까?' 하는 생각에 <타샤의 정원>을 꺼내 읽어본다.

타샤만큼 정원애호가는 아닐지라도 한 때는 정갈하게 꾸며놓은 나의 텃밭 가꾸기 실력이 아까워서라도, 아니 그보다 더 점점 삭막하게 늙어가는 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녹이기 위해서라도 타샤의 정원이 필요했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이지만 이미 봄이 온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도는 버몬트에서 3월, 4월 타샤는 봄에 화려해질 정원을 준비한다.

타샤의 작은 천국에 정점을 찍는 것은 따뜻한 햇살도, 청량한 바람도 아닌 겨울 동안 내리는 눈이다.

눈이 얼마큼 왔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봄의 정원이 흥하냐 망하냐가 달려있다는 매우 신기한 자연의 섭리이다.

눈이 일찍 녹는다고 봄이 바로 오지 않는 것처럼, 눈이 일찍 녹으면 오히려 장미가 죽는 것처럼 모든 것에는 그때와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버몬트의 눈은 장미를 위해 일찍 녹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눈이 녹기 시작하는 4월 초, 버몬트 사람들이 '진흙탕 계절'이라 부를 만큼 눈이 녹으면서 길이 엉망진창이 된다. 눈이 오지 않아도 험한 길인지라 진흙탕이 되어버리면 씨앗이며 화초들들 배달할 재간이 없다.

타샤가 온전히 고립되는 그 시기에 타샤는 봄을 준비한다.

겨울 동안 상한 꽃밭을 점검하고, 온실에서 키우고 있던 화초들을 오롯하게 마주할 수 있고, 또 그것들을 그리는 시간을 확보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꽃을 피울 준비가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들도 발견하는 시기.

그래서 타샤는 4월의 고립이 아무렇지도 않다.


타샤의 정원에는 개나리가 없다.

"너무 교외주택단지의 분위기를 풍겨서 내 정원에는 어울리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고집스레 자신의 정원에 어울리는 꽃과 나무들만 키운다. 아무리 꽃이 예뻐도, 아무리 꽃을 좋아해도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에는 욕심내지 않는 것, 그래서 타샤의 정원은 타샤의 시그니처가 되는지도 모른다.


나의 텃밭에도 욕심을 냈던 허브들이 있었다.

미처 다 쓰지도 못할 애플민트와 바질을 상추와 고추 옆에 잔뜩 심어놓고 관리도 해주지 않아 텃밭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허브들.

작은 집에 꾸역꾸역 밀어 넣은 듯한 느낌을 나는 타샤를 통해 배운다.

사실 텃밭과 정원은 완전히 다르지만 말이다.

오로지 인간의 입으로 들어갈 생계유지를 위한 텃밭은 어쩌면 인간의 욕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자존을 생각할 때면 직접 땀 흘려 키운 신선한 채소를 내 몸에 공급하는 것만큼 인간다운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저 좋아하니까 나무나 꽃에게 좋으리라 생각되는 것,
나무와 꽃이 기뻐하리라 생각되는 것을 하고 있을 뿐이지요.



타샤의 기운을 받아 올해는 다시 옥상 텃밭에 채소를 심고 싶어졌다.

이번에는 타샤처럼 팬지도 심어볼까?

수선화가 팬지를 만나지 못한 채 사라지더라도 그들만의 땅 속에서 그 온기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피었던 옆자리에 팬지가 피었구나." 하며 수선화는 그 땅을 늘 혼자만 불쑥 올라온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내년엔 더 튼튼하고 더 쨍한 노란빛으로 올라올지도.


그리고 곧 앵두나무도 이렇게 분홍꽃을 피우겠지.


나의 텃밭과 타샤의 정원은 다르다.

타샤처럼 오리쿨라 앵초를 보며 행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대롱대롱 매달린 청양고추를 보며 꽃에게서 얻는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물론 맛있게 매울 청양고추를 된장에 푹 찍어 먹는 것을 상상하며 행복감을 느낄 순 있다.

그리고 꽃보다 밥이 먼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너무 인간적이지 않은가?

메인은 먹거리일지라도 사이드는 몇몇의 꽃도 있다. ㅎㅎㅎ





봄은 활기차다.

사랑스럽다는 말이 저절로 이해가 되는 계절이다.

봄을 열어준 나의 수선화가 내게 손짓한다.

올해는 유달리 봄이 아름다울 것 같아.

마음도 봄처럼 활기차게 피어오르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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