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터널을 지나 밝은 햇살이 비치는 터널 끝에서 나는 한 걸음씩 걷기 시작했다. 익숙한 환경이 아니라 적응이 쉽지 않았다. 뭔가 달라진 내 마음이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 망설임이 내겐 걱정이고 염려였지만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그 용기의 끝이 어떤 결론을 얻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긴 시간 관계 속에서 갈등하면서도 내가 어떤 이유로 힘들어하는지, 그 갈등이 내가 뭘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인지, 내가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상담자로 내담자를 만나면서 묻는 질문을 나에게 던지지 않았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어쩌면 그 상황과 사람에만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상태에서 내게 던진 질문은 단지 왜 나한테 이러지? 내가 뭘 잘못했나? 어떻게 더 잘하나? 이 정도면 좋은 며느리는 아니어도 평균적인 며느리는 될 것 같은데, 아닌가? 이런 질문들을 수없이 던졌던 것 같다. 질문의 답은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사실 답을 찾지 못할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질문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었으니까 말이다.
내 마음에 대한 탐색의 시작이 작은 빛이 되면서 내 자신에게 정말 했어야 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첫 질문 : “그 관계 갈등 속에서 어떤 이유로 힘들어 하니?”
새로운 시작을 위한 첫걸음은 거리두기였다. 어쩌면 나는 결혼과 동시에 내가 누군가의 새로운 가족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상적인 기대였는지 모른다. 그 바탕에는 나도 가족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내 욕구가 컸다. 그래서 어쩌면 존재로 인정받지 못함을 견디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안 볼 수 있어서 안 볼 수 있는 관계였다면 그리 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어서 너무 버겁게 느껴졌던 내 감정의 흐름이 지금도 느껴진다. 하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음의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요동케 하는 감정의 자극에 거리를 두었다. 장을 보며 원하는 물건을 담듯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감정적 자극을 내 마음에 담았고, 그렇지 못한 수준의 감정을 주는 자극이라면 담지 않으려 노력했고, 어느 정도 이상의 그 자극에 대한 생각을 멈추려 의지적으로 노력했다. 언젠가 감당할 수 있을 때 담으려 미뤄두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게 다가오는 감정 자극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지 않고 나를 기준으로 재해석해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거리두기와 골라 담기, 재해석의 선택은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조금씩 내 마음에 뭔지 모를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알지 못할 느낌이 찾아왔다. 나를 내가 아닌 누군가와 연관 짓지 않고, 그냥 내가 나로 느껴지는 감정. 뭐라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 느낌은 작은 희열을 가져왔다.
어쩌면 내가 받고 싶었던 인정은 가족 아니 한 사람, 한 존재로서의 인정이었을 것이다. 그 인정을 꼭 그 대상에게 받아야 하는 것인지?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것인지? 아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마음의 거리를 두고 나서 그 인정에 대한 욕구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내 존재는 누군가 인정해줘서 존재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서서히 내 존재에 대한 내 자신의 인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움의 과거를 탐색하며 내가 지나왔던 그 시간들 속에서 찾았던 나.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과거로부터 자유한 나. 누군가의 어떠함이나 누군가의 인정으로 존재를 인정받을 필요 없는 나를 기억하며 다시 일어났다. 아마 우린 수많은 만남 속에서 누군가의 인정을 받길 원할 것이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말이다. 하지만 그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만으로 살아간다면 삶은 행복이라는 문을 통과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인정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할 때 우린 행복해질 수 있다.
인정을 받으려고 무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그것이 내 행복이 되길 바라며 움직이려고 했다. 내가 가족이 되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누군가 날 가족으로 인정해서가 아니라 내 생각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상대가 나를 가족이라 생각해도 내 마음이 그와 동일하게 느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가족 됨을 누리겠는가? 상대의 인정에 요동하지 않고 스스로 가족으로 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해야 할 의무를 감당하는 것까지 하기로 했다. 그 역할과 의무를 감당한 후의 평가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냥 최선을 다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의 헌신과 섬김이면 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너무 잘하려 말고, 편안하게, 평가에 메이지 말고 원하는 대로 그렇게 내 역할을 찾고, 즐기고 싶어졌다.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고 말할 용기도 생겼다. 어차피 해도 안 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때가 많으니 연연해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상대의 인정을 구하지만 상대는 내가 뭘 하든 별 의미를 두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데 우린 많은 관계 속에서 그걸 잊고 살아간다. 내가 만나는 많은 내담자들도 그랬다. 상대방의 반응과 인정을 원하지만 정작 상대방은 나의 인정 욕구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이다. 이런 인정 욕구를 추구하는 삶을 오래 살다 보면 상대방의 마음과 상관없이 우린 우리 나름의 기준으로 상대방의 인정을 받으려는 삶을 살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와 이 문제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다. 관계적 문제를 내 시선으로 정리한 것이니 말이다. 나도 나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나의 인정 욕구에서 자유하려 노력했다. 무언가 무거운 걸 내려놓은 듯했다.
두 번째 질문 : “그 갈등이 내가 뭘 어떻게 해서 일까?”
인정받으려는 내 욕구를 인식하고 나서 내 스스로 어쩌면 나를 힘들게 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와의 관계뿐 아니라 다른 관계도 돌아보며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내 마음의 문제를 인지하고 나서는 다시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의 기대에 자유하지 못했던 나를 발견했다. 어쩌면 기대를 채우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일까? 갈등 상황마다 내가 아닌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했고, 왜 나에게 이런 걸 요구하는지 갈등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서 내가 이 관계에서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나는 결론을 내렸다. 난 내게 허락된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해 역할에 합당한 일들을 하고 있다. 상대가 부족하다 느끼면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다. 이젠 자유하기로 했다. 상대의 기대에 말이다. 그 기대를 채우면 내 존재가 인정될까? 그 기대를 채우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까? 수없이 생각해 보고 고민했던 시간들. 하지만 결론은 아니 다다. 늘 새로운 기대가 생기기 마련이다. 인간관계는 서로의 기대를 채우기 위한 관계는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배려하며 행동하고 섬길 때, 그 섬김과 배려가 서로의 관계를 돈독하게, 건강하게 만들어가 간다고 생각한다.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자 상대방의 기대에 자유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상대방의 기대에 따라 움직이려 하지 않고 내가 그 관계의 주체가 되어 상대방을 위해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을 하려 했다. 어려울 것 같았지만 하나씩 하나씩 시도해보았다. 어떤 것을 함에 있어 그 일에 대해서는 상대방의 기대 수준에 미치고 미치지 못함이 내 감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내 마음 가짐이 내 감정을 결정하게 했다. 무언가에 매여있다가 풀려난 듯한 느낌. 나를 속박하고 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진 듯했다. 상대가 내게 무언가 기대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그 기대를 만족시키려 해서 나를 힘들게 했던 걸 인정하고 그 매임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쩌면 누구도 나를 매지 않았을 것이다. 내 스스로 나를 얽어맸는지도 모른다. 아니 맞을 거다. 이젠 누군가의 기대를 보지 않고 내 스스로 관계 속에 설정한 기준으로 상대방을 위해 무언가 움직이고 그 움직임의 결과를 평가하기보다는 그냥 그 움직임에 만족해하는 삶을 살려한다.
관계 속에서 우린 많은 경우 상대방을 탓한다. 갈등 상황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갈등 상황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변화로 갈등에서 벗어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나 역시 상대방을 변화를 보지 못했다. 그 변화를 기대해서 사실 더 오래 기다렸고, 그 기다림의 과정에서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젠 상대방이 아닌 내가 변화하는 길을 선택했다. 내가 바꿀 수 있고 내가 주체가 되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말이다.
이런 생각의 전환으로 나는 많은 부분에 자유를 경험하고 있다. 사실 마음은 조금 불편할 때도 있지만 그 불편함을 이기고 심리적 평안을 얻어 가고 매 순간 대처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 관계 안의 정답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관계 속에서 내 자신의 자유와 평안을 찾아가는 연습을 하다 보면 내면의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의 기대에 자유하면서 나도 상대방에게 기대하지 않는 연습을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이 정도”라는 기준을 내려놓았다. 비교를 멈췄다. 남들과 비교하며 너무 차가운 듯 한 어머니의 모습에 실망했던 나를 돌아보았다. 어쩌면 나도 어머니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실망이 컸고 그 실망에 화가 났고 미웠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가진 기대조차 내려놓았다. 특별한 것을 기대한 적은 없었지만 내려놓았다. 그 기대가 따뜻하지만 작은 무언가였지만 그것 조차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그 내려놓음이 내 마음의 자유를 가져왔다.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도 없어졌다.
세 번째 질문 : “내가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이 아닌 내게서 찾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그 결과 인정 욕구와 상대방에 대한 기대감을 발견했고 그 두 가지 원인을 해결하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게서 찾은 관계 갈등의 원인을 어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고 그 해결책을 머리와 마음으로 알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서 실천하려 노력했다. 관계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어떤 순간에는 직면해서 무언가 시도하고 해결책을 실천하려 노력하기보다는 회피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그 마음은 순간순간 나를 찾아왔고 내 마음에 갈등을 일으켰다. 하지만 한 번의 성공, 두 번의 성공이 거듭되면서 내가 행복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 경험했고, 그 행복을 위해 내가 인정과 기대에서 ‘자유’ 해야 한다는 것을 내 삶을 증거로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실패도 여러 차례 경험했고, 지금도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를 경험한 이후 내 삶에는 인정과 기대에 얽매이는 순간이 찾아와 다시 갈등을 경험한다 해도 그 순간이 이전과 달리 짧아졌고, 그 순간에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내게서 찾아 내 스스로 그 문제 상황에서 당당히 걸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관계 갈등 속에서 내가 할 수 없는 상대방의 마음을 바꾸는 것에 너무 집중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내 마음은 내가 조절하고 관리할 수 있는 내 영역이지만, 상대방의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니 내가 어찌하랴, 누구를 이해하라, 누구를 인정하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안다. 상대방의 마음은 상대방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겨 놓기로 했다. 갈등 상황에서 상대가 아닌 내게 집중하며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을 통해 자유를 경험하는 내 삶이 되길 바란다.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 남은 여정에도 나는 해결하기 힘든 미움의 갈등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좀 더 빠른 시간 내에 내게 집중하며 내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