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샘 Aug 08. 2022

선택 2 - 수용

오랜 시간 나는 상대방의 인정과 상대방에 대한 나의 기대에 대한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는 게 비우는 것인지, 자유를 선택한 것인지 나 스스로도 고민이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오랜 고민과 선택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내면을 위한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이 자유로 가는 길이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 과정이 처음에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느끼기에 어색하고 불편하고, 뭔가 모를 걱정을 갖게 했지만 그건 잠시였다. 그 순간을 지나면서 나는 분리를 경험했다. 감정의 갈등을 유발하는 상황에서 홀로 서 있을 용기를 얻었다. 그러면서 그 용기가 내게 어떤 평안을 안겨주는지도 경험하게 되었다. 내가 선택한 자유에 누가 어떤 평가를 하는지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다. 내 내면의 안정과 평안에 의미를 부여했고, 그 의미부여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어떤 것을 해주거나, 나를 어떻게 받아들여줘서가 아니었다. 이 사실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하지만 몸부림 후의 깨달음이 주는 내 내면의 평안이 너무 소중하다 느껴졌다. 이 순간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스스로의 선택과 도전하려는 용기를 갖고 움직였다는 사실에 나 자신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자유를 선택한 후 한동안 나 자신에게 집중했었다. 의도적으로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내 의식의 흐름의 중심에 타인을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 내게 잠시 머뭇거림이 찾아왔다. 과거 내가 아버지를 수용했던 그 시간. 내가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려 했던 순간이 내 마음속에 맴돌았다. 무엇을 원해 이 순간을 떠올리고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관계 속에서 분리를 연습하는 내게 난 격려를 보내고 싶었다. 잘하고 있다고, 이렇게 하는 것이 관계 안에서 서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나 자신을 수용해주고 싶었다. 누군가 내가 현재 변화를 주고 있는 태도에 대해 인정하고 수용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 스스로 나의 선택을 인정하고 나를 수용해주는 것이 필요했다. 지금까지는 어쩌면 ‘나의 수용’이 아닌 타인의 어떠함에 집중했었다. 그래서 관계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 갈등 속에 함몰되었던 순간이 있었다.


내가 나를 수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쩌면 나의 선택에 대한 용기에 동의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관계 갈등 속에서 나는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며 그 선택으로 누군가에게 비난받을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나를 정말 사랑했다면 나를 위해 용기를 냈을 거다. 내가 먼저 나를 수용하는 것! 관계 갈등 속에 나의 내면의 안정을 먼저 추구하는 용기 있는 선택에 동의해주는 것, 그것이 나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 수용은 내가 관계 속에서 반복되는 실수를 하지 않고, 독립된 한 인격으로 서 있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수용하는 것에 대해 미움의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민한 후 진지하게 시간을 내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 고민이 갈등 상황에 있는 관계의 변화도 가져왔지만 내 삶의 많은 관계들 속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공동체, 어쩌면 가장 편안한 관계 형성이 이뤄져야 하는 관계 속에서 타인이 아닌 내가 수용한 나를 누군가 배척하는 것에 대해 이전과 다르게 흔들리는 날 경험했다. 그 흔들리는 감정이 느껴질 때, 내가 경험하는 배척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어느 순간 의미부여가 되지 않았다. 갈등을 경험하는 순간이 찾아와도 그 중심에는 ‘나 자신의 수용을 받는 내’가 있었다. 그 순간 갈등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관계 갈등을 경험한다. 하지만 달라진 건 ‘나’다. 내가 달라진 이후 갈등도 다른 문제가 되었다. 내가 경험하는 상황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내게 집중하면서 문제는 대스럽지 않게 내 내면 속에서 끝날 때가 많았다.


미움의 과거를 통찰하고 재해석 과정을 거쳐 나 자신을 수용했고 그 과정을 지나면서 내면의 갈등을 경험하게 했던 대상에 대한 수용 과정을 거쳤다. 그 기억이 떠오르면서 현재 갈등 경험의 대상과 심리적 거리두기와 분리 이상의 무엇을 시도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 본다면 상대방의 삶의 이유를 숙고해 보며 상대방이 그리해야 하는 이유,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인정하고 수용해주는 것이 내게 필요했다. 이 인정과 수용이 상대방을 다 이해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삶에 대해 내가 생각하고 고민할 몫 이상을 하지 않을 자유가 내게 있다는 의미다. 상대방의 삶이 누군가와 갈등 상황을 만들며 흘러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 그 이유의 의미는 내가 찾을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찾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겨 두는 것이다. 그것이 상대방을 향한 내 수용이다. 관계 갈등 상황에서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내려놓고, 상대방에게 기대하지 않으며 자유를 선택하고 상대방과 거리를 두며 문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용기를 갖되 상대방의 문제는 상대방이 해결해 가도록 내려놓는 것이 상대방을 수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수용이 어쩌면 나와 갈등하는 상대의 나를 향한 여러 감정 표현과 나를 대하는 태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상대방을 나와 같은 인격으로 인정해주고 그 인격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삶을 살아가는 한 방법으로 나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내게 필요했다. 물론 그 방법은 내가 수용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수용이 어려울 때 우리는 갈등하고 그 갈등으로 인해 번민하며 그 과정을 거쳐 성장해가는지도 모른다. 물론 일정 기간은 성장이 아닌 아픔의 기간일지도 모른다. 그 아픔의 기간도 의미가 있다. 아픔이 있어서 성장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의식의 흐름의 이유가 있듯, 상대방에게도 내가 알지 못 하지만 그렇게 의식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이해해 보려 한다. 이런 마음을 갖기 시작하면서 사실 상대방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어디론가 떠나버린 듯하다.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일까?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 노력했던 것처럼, 상대방을 상대방 자신이 수용하듯 그냥 그럴 수 있겠다고 수용해 보려 한다. 그 이해가 바탕이 된다면 갈등 상황에서도 상대방에게 너무 감정적인 대응은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고, 상대방과 적절한 심리적 거리 두기를 하며 문제 상황 속에 흔들지 않고 서서 갈등을 조금씩 해결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 내면의 감정적 갈등도 현저히 감소할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수용이 가장 필요한 관계가 어쩌면 가족 안의 관계 갈등 상황일 것이다. 우린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세상에 나면서부터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가지고 태어났고 그 울타리 안에서 여러 관계를 맺고 서로 살아왔다. 그래서 그 관계 안의 갈등은 어쩌면 쉽게 해결될 듯 하지만 해결이 아닌 덮임과 누름으로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숨겨둔 채 살아갈 때가 더 많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누군가 내 곁을 떠나가게 된다면 그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보낸 시간을 후회하기도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관계 갈등을 서로를 수용하는 가운데 해결해가길 바란다. 그 해결이 가족 안에서 누려야 할 행복을 누리게 하고, 그 행복으로 인해 누군가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관계는 늘 계속될 듯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을 때가 많다. 모든 갈등을 다 이해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그냥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어 해결해 볼 용기를 갖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이전 09화 선택 1 자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