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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Jun 08. 2022

안녕, 나의 파도

바람이 불기 전까지 그 이름은 ‘바다’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 따뜻했지만 성장하고 나서 본 기억은 알 수 없는 아련함과 슬픔으로 감싸 슬퍼한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항상…, 그런 기억을 품고 먹으며 하루를 버텼어요.

이 이야기는 제 이야기입니다. 많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이유로 용기를 가지고 꿈을 꾸게 된 사연을 적은 이야기.


‘가족’ 이름이 주는 상처와 그 ‘상처’ 또 다른 단어로 ‘트라우마’ 안고 살던 제가 어떤 삶을 살았고 지금에서야 ‘가족’이라는 이름의 트라우마를 안고 천천히 ‘나’ 찾기 위해 심리상담과 약물치료를 통해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선택하고 치유하는지 과정을 담은 에세이입니다.


우울증과 불안장애, 공황장애 그리고 극심한 불면증 앓다 결국 해리장애까지 왔지만 저는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저의 글을 읽은 독자분들에게 알려 드리고 싶어요! “힘내!”, “넌 할 수 있어!” 단순한 응원으로 다가가지 않을 겁니다.


그냥

이런 사람도 살고 있어요, 그러니 정말 우리 같이 해봐요.







어렴풋 기억하는 4살에 살았던 집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여름이 오고 장마가 우리에게 노크할 때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 세숫대야에 빗물을 받았다. 또 겨울이 되면 바람을 집을 감싸다 내 몸을 휘감았던 날, 엄마는 슬픈 얼굴로 날 꼭 안아주셨다.


엄마의 품에 안겨 올려다본 슬픈 얼굴은 어린 내가 보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엄마랑 이렇게 꼬옥 안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데 엄마는 왜 구슬픈 표정으로 있는 걸까? 나는 그때 정말 단순한 아이라 엄마가 지닌 무게를 내가 가진 작은 숫자론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품에 느낀 따뜻함만 생각했었지만 엄마는 작은 생명체를 안고 등에 느낀 서늘함이 ‘이 험한 세상,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해?’라는 걱정이 있었다는 걸 훗날에 알게 됐다.


알지 않아도 됐었는데 감정을 알게 된 건 10살, 나는 남들보다 일찍 알았다. 그 씁쓸함과 비참함을.


언제부터 차가운 서울에 살았는지 알 수는 없다. 크면서 엄마가 항상 한 말은 태어나자 푼돈을 들고 서울에 도망치듯 왔다는데 아무도 그 말에 대해 말해주지 않아 정확하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내 기억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땐 굳게 믿었는데 지금에서야 왜 엄마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지, 흐릿한 어린 기억을 의존해야 했는지 나중에 말하고 싶다. 지금은 아직이라 생각된다.


어릴 적 나는 엄마만 보는 해바라기, 엄마 바라기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나 엄마가 전부일 때가 있는데 나는 유독 더더 그랬다. 당시 미혼모 가정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무겁게 느껴지는 단어, ‘미혼모 가정’ 하지만, 온전히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라고…, 그렇게 포장할 거다. 여태까지도,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누구나 집에서 부모님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 기억이 있을 거다. 부모님이 오기 전 집은 유난히도 어둡고 추웠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기다리는 사람이 오면 촛불이 켜져 어둠보단 온기를 느끼게 해 준다. 그걸 난 마법사라 불렀다. 무서움은 사라지고 갖고 있던 순간의 추위는 사라지는 가장 따스한 마법을 부리는 특별한 마법사 같다. 그 마법사는 나를 웃게 해 준 우리 엄마.



어릴 적 나는 항상 엄마를 쫓아 엄마의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다 같이 퇴근하곤 했다. 같이 걸어가는  길이 너무 좋아 오지 말라고 화를 내도 배시시 웃으며 엄마의 손가락 하나를 잡고 따라갔다. 어떤 날에는 엄마의 손을 잡고 가다 눈높이를 맞추고  보며 “우리 , 오늘은  살이야?”

한 번씩 물어보는 엉뚱한 질문에 나는 숫자를 세기 위해 손가락을 다 펴서 “6살!” 외치면 엄마가 귀엽다는 의미가 담긴 작은 미소로 “아닌데~, 오늘부터 7살이야.” 정정해줬다. 그렇게 매년 한 해가 지나가면 그렇게 알려줬다. 매일 같은 시간을 보낸다 느끼는 나에겐 숫자가 매번 달라지는 게 어릴 땐 왜 그리 신기했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나를   다양한 표정을 짓는 척하지만  눈엔 항상 언제나 똑같았다. 슬프고 아프고 힘들다가도 어느 날엔  화가 가득  있었다.  엄마는 항상  표정을 숨기는  노력하는 걸까 궁금했는데 사실 어쩌면 숨기지않고 항상 표출했는데  대상이 ‘ 아닌 세상에 향해 있기를 바라고 있을 지도. 그렇게 느낀 이유가 있었다. 엄마와 가끔 동네 구멍가게에 가면 나는  장난감 코너에 멈춰서 실랑이를 했다.


“갖고 싶다고오!”

“안 돼!”

“엄마아…, 사주면 안 돼요? 말 잘 듣고 엄마가 일하는 곳에 안 갈게. 응?”


그 말을 한 후엔 엄마는 지갑을 열어 확인한 후에 마음을 굳게 먹은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안 돼.”


꼭, 엄마는 지갑을 열어 확인하거나 잠시 생각하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전엔 ‘그래, 이 번만…,’ 하다가도.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엄마에게 들을 수 있었다.

엄마는 딸만 6, 아들 1 있는 대가족의 셋째인데 서울에  둘이  때는 둘째 이모가  동네에 살고 있었다. 엄마의 말론, 서울에 정착하려고 노력하던  둘째 이모가 도와주겠다며 옷을 만드는 공장에서 미싱 일을 줬는데 월급을  푼도  주고 시켰다고 한다.  마디로 열정 페이. 그뿐만 아니라, 엄마의 카드를 들고 이모부는 명품을 구매했고 골프를 했으며 이모도 역시 동조했다고. 이모를 통해 외할아버지가 쌀을 보내도 엄마는 하나도 몰랐다고 한다. 이모가 우리 몫까지 모두 먹어서 그렇다는데 엄마가  말이라 옛날엔 믿었지만 지금은 누구의 말도  믿는다. 그때 당시는 엄마와 이모, 이모부와의 문제인데 현재는 이를 드륵드륵 갈았던 엄마가 복수를  둘째 이모는 외가에  오지도 않을뿐더러 오셔도 왕따. 그렇기에 이모한테 그때 이야기를 들을  없고 이모,  역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다.  마디로 말하면 서로가 불편한 관계. 나는 어릴  이모한테 당한 수모가 있었고 이모의 자식들인 사촌언니와 동생에게 당한 무시와 놀림이 있기 때문이다.


아, 장난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아이들처럼 장난감이 많거나 하지 않았다. 장난감과 인형을 정말 좋아했지만, 원하는 만큼 가지지 않아도 나는 좋았다. 행복했다. 그 이유가 조금 특별했다. 내 기준으로 말이다.


생일이 되면 나를 주인공으로 두고 갖고 싶어 고집부리게 했던 장난감, 인형 등 선물을 어떻게 알고 줬다. 아마 그건 엄마가 말해주지 않았을까? 아무튼 내가 좋아한 오빠, 나를 좋아해 주는 이모들과 삼촌들이 나를 위해 모여 같이 밥도 먹고 생일 초도 같이 불고 했다.


그때가 내 손에 꼽히는 행복한 기억이다.


나는 어릴 때 김치김밥을 좋아했는데 엄마는 항상 기본 김밥, 당시 천 원했던 김밥을 사줘서 투닥투닥 잘 싸웠다.

고작 200? 500 차이 나는 김밥인데도 먹기 어려웠을 정도로 형편이 많이  좋았다는  고작 6살에서 7  아이가 알고 있을 만큼 힘들었다. 7  하루는 빵이나 우유  잔으로 버텨야 했거나 혹은, 아무것도 먹지  하고 보낸 적도 있다. 그런 날이 있을 때는 더더욱 엄마의 표정에서 나는 우울을 읽었다. 우울하고 절망적일  엄마는 나를  안고 울음을 삼키는  많다. , 어릴  정말 적게는 하루에 2번은 코피를 많이 흘렸기도 하고 어느 날은 아파서 숨을 헐떡인 적도 있으나 엄마는 오열할  응급실? 상상도  했다.  기억으로 서울에서 엄마랑  둘이  적엔 소아과를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엄마는 항상 표정 한편에 우울과 절망 혹은 나에 대한 미안함을 갖고 있었다. 어려도   있었지만 엄마에겐 내색하지 않았다.   있었지만 보지 않았고 느낄  있지만, 모르는 척하는  엄마한테 해줄  있는  표현이었다.


나는 엄마가 세상이니까.


감정이 쌓여  골이 깊을 적엔 결국 화로 분출한 적이 많다. 화를 내는 엄마는 정말 무서워서 마냥 울었다. 그때 화내는 엄마가 가진 버릇이 있었는데 그건  소리를 지르고 아랫입술을 오른쪽으로 비트는 것이다.  버릇을 보면 무조건 엄마한테 빌었다. 어떤 이유였던, 내가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도 무서워서, 당장이라도 나를 버리는  이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유를 모른  혼나도 나는 엄마가 좋았다. 엄마는 내가 가진 세상의 크기였으니까.


엄마는 야근을 자주 했었다. 그럼 나는 일터의 다락방에서 티비로 만화를 보며 엄마랑 같이 퇴근하길 기다렸다. 근데 이런 날이 많아지자 음흉한 눈빛을 받았다. 우릴 지켜주는 사람이 없어서 엄마가 일하는 곳의 사장님이 가끔 이상한 눈빛으로  보거나 착하네, 혹은 아이고 예쁘네 라는 말을 하면서 나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묘한 쓰다듬이 많아지자 엄마는  집에 두고 다녔다. 두고 간다고 내가 가만히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엄마가 좋아서,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보고 싶은데   없으니까 몰래 일터 근처에 숨어 엄마를 지켜보다  사장님이 담배 피우러 나왔다  발견해 몰래 왔다는 사실을 걸렸다. 그래서 나중엔 엄마가 일터를 몰래 옮겼고 나는 이리저리 같이 다니던 길을 용감하게 걸어서 엄마를 찾다가 경찰차를 타게 되었다.


당연히 크게 혼났지만 혼나도 어떡해, 엄마가 좋은데.


엄마 옆에 있겠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나 때문에 매번 경찰서에 자주 들락거려 늘 명단에 내가 있고 늘 보던 경찰분들은 날 반기는 수준까지 오자 결국 엄마는 나에게 졌다.


그만큼 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가 ‘나’였고, 나는 엄마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불같이 화를 내서 무서움에 바들바들 떨며 손발을 빌어더라도, 난 꼭 엄마 옆에 있어야 했다.


지구에 태양이 사라질  없는 것처럼, 나는 지구 엄마는 태양. 태양이 없는 지구는 암흑뿐이니 엄마는 전부이자 나의 태양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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