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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몰랑맘 Feb 21. 2024

'하지 마' 세계

해방의 밤

'후다다다닥'


내 눈을 피해 뭔가를 움켜쥐고 도망치는 아이. 내 아이 손에든게 젤리임을 직감한 나는 "이리 안내?" 하며 아이를 쫓는다. 유난히 단 걸 좋아하는 둘째 아이의 치아상태와 건강이 늘 걱정이긴 하지만, 아이의 행동이 귀여워 "그럼 딱 한 개만 먹는 거야!" 하며 슬쩍 젤리를 용인해 준다.


첫째  아이는 내 눈치를 조금 더 많이 살핀다. 이런 성향은 초보 엄마 시절 서툴었던 내 훈육 반, 기질 반으로 이루어졌으리라 짐작한다. 둘째 아이에 비해 나의 모진 말을 많이 들었을 아이다.


"엄마, 나 과자 하나만 먹어도 돼?"


여기까진 물어봐줘서 고마운 질문에 속한다. 하지만, 아래 질문들은 나의 걱정버튼이자 짜증버튼이다. '이런 거 하나하나까지 왜 물어보지?'라는 짜증,   '스스로 좀 알아서 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의존적인 것 아닌가, '라는 걱정 말이다.


"엄마, 나 무슨 책 읽을까?"

"엄마, 나 무슨 그림 그릴까?"


어떤 날은 나의 관심을 애달프게 찾는 듯한 말로 들려 상냥하게 일러주는 날도 있긴 하지만,  대다수는


"그냥 네가 좀 알아서 하면 안 되니?"


라고 다그친다. 그래 놓고 아이가 문제집을 두 쪽만 풀고 말면


"두 쪽만 푸는 건 심하지 않니 30분 동안 한 거 맞니?!."


라고, 아이의 결정을 용인하지 못한다. 아니 더 정확히는 30분은 꼭 수학을 하기로 아이와 정했는데, 그 시간 동안 두 쪽 밖에 풀지 못하는 아이가 답답한 것이다.


아이가 커갈수록 가장 힘든 부분이 바로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어디까지 기다려줄 것인지에 대한 경계이다. 엄마의 울타리를 대체 언제, 어디까지 치고, 어느 시점에서 거두어야 할까 늘 헷갈린다.  20살 전의 아이들에게는 지시와 단호함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조선미 교수님의 말씀을 위안 삼는 요즘이다. '자기 주도'가 어려운 연령이기 때문에 꼭 해야 할 일들까지 애매하게 요청하거나 선택에 맡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커 갈수록 아이의 선택을 믿고, 기다려줘야 함 또한 부모의 미덕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정리하자면. 나의 통제권 밖에서 어질러질 생활습관이 걱정되는 한편 나의 통제권 안에서 독립심과 자유의지가 꺾일까 두렵기도 한 것이다.  거의 매일 그 경계에서 방황하는 나는 은유 작가님의 '해방의 밤'이라는 책을 읽다가 아래 문장을 만났다.


"하지 마의 세계에 갇힌 사람은 최초의 욕구가 발동했을 때 '잘하는 법'을 고민하기도 전에 내가 이걸 해도 되는 사람인가, 하는 자기 의심과 싸우게 됩니다."

사실 이건 내 얘기에 가깝다. 엄마가 통제적인 분은 아니셨지만, 유난히 종교적인 신념이 강해 일요일에는 하면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 '세상적인 것'이라는 이름 아래 가요, 드라마 등의 매체를 접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했고, 시험기간에도 공부보다는 예배 참석이 우선이었다. '하지 마의 세계'란 나에게 10대 시절 '세 상것들에 빠지면 안 된다.'라는 강박과 비슷했다. 물론 그 통제의 결과 나는 지금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는 엄마의 통제에서 드디어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 답답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20대 초반 교환학생을 떠났고, 결혼도 일찍 하게 되었다. 엄마와 관계가 유난히 나쁜 건 아니지만, 웬만하면 깊은 대화를 하지 않는다. 엄마의 신념이 다시 나에게 터져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겉으로는 엄마의 세계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여전히 나는 어릴 때부터 베어 온 '자기 의심'과 매번 싸운다.


'내가 지금 이래도 되나.', '이런 말을 이런 상황에서 해도 되나.' 내 아이만큼은 이런 종류의 자기 의심보다는 '자기 신뢰' 탑재하고, 당당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까지 그려온 전체적인 육아그림은 스스로  만족스럽기는 하다. 내 경험을 반면거울삼아 아이와 함께 노래를 듣고, 춤추고, 자주 놀러 다녔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학원을 모두 끊고, 집에서 꾸준히 책만 읽어 온 것도 아이와 나 사이에 '강박'의 벽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도 나도 다양한 책을 읽다 보니 얘깃거리가 늘 많다는 것도 긍정적이다. 아이가 커가면서 꽤 친구 같은 대화를 주고받을 때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자잘하게 잘라보면 내가 갇혀 있었던 엄마의 세계와는 다른, 온전히 나의 통제로 만든 '하지 마'의 세계를 촘촘하게 만들고 있었다. 조선미 교수님의 '단호함'을 방패 삼아  아이에게 온갖 내 취향을 강요해 온 것은 아닌지.


어제 하루만 떠올려봐도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해.'

'밥 먹는 시간은 30분을 넘기지 마.'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해.'


등의 말들을 뱉어냈다. 물론 필요한 말들이기도 하다. 우리만의 규칙도 필요한 법이니까. 하지만,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현재 아이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엄마에게  혼날까 싶어 늘 체크하고, 자기를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는 아이다. 늘 고민해 왔던 그 '통제'의 경계를 이제는 좀 느슨하게 풀어도 되지 않을까. 아이가 '자기 의심'과 싸우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잘하는 법'을 찾도록 지지해 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지저분한 책상을 보고 정리하라는 말을 참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예쁜 것들을 눈에 보이게 올려놓고 싶어 하는 아이의 정리 방법을 존중하고, 스스로 터득해 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지금 우리 아이에게 필요한 엄마의 태도가 아닐까.


누군가는 어질러진 집을 뒤로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모습을 보고 이기적인 엄마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지 않는가. 이렇게 글로 써보니 쉬이 역지사지가 이루어진다. 나도 아이들도, 다른 사람의 원함 말고, 우리의 원함에 따라 행동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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