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언어
내가 이래서 책을 끊을 수가 없다.
읽는 책마다 어미로서 무릎을 탁탁 치게 만드는 구절들을 만나니 말이다. 미혼인 김겨울 작가님의 글은 아이를 낳고,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다고 자부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역시 그 힘은 '책'인가. 책 외에도 음악, 춤을 좋아하는 작가가 묘하게 나하고도 접점이 있어 그녀의 말이 친근하고, 설득력있게 전해진다.
작가는 아홉살때 (딱 지금 우리 딸들의 중간 나이다.) 세 달 동안 학교 끝나면 네 시간씩 콩쿨을 준비한다. 그런데 갑자기 콩쿨 2주 전 곡이 바뀐다. 세 달 동안 네 시간이면 90일 x 4시간 = 360 시간 연습한 시간이 날라간 것이다.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한다. 허송세월 했다고. 그 시간에 수학을 했다면 문제집 몇 권을 풀었을 것이다. 아마 내가 당시 김겨울 작가님의 엄마였다면 무책임한 피아노 학원에 컴플레인을 하고, 끝까지 매달려 어찌되었든 연습한 곳으로 대회를 치르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5년 전부터 나와 붙어다니는 언니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말 '대한민국에 안되는게 어딨어.' 정신으로 말이다.
하지만, 결국 바뀐 곡으로 연주를 끝내고 20년을 더 살아 온 김겨울 작가는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현재 인생의 연결고리 안에 그 일을 의미있게 배치한다.
'그렇게 아무런 의미 없이 흘러간 콩쿨 준비의 시간은 오랜 숙성을 통해 지금의 김겨울이라는 인간을 만들어 냈다. 하루에 네 시간씩 연주를 준비하는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무대의 설렘도, 음악의 즐거움도, 마치 DNA에 새겨진 듯 가지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무의미한 준비의 마법이다.'
그 어떤 육아서에서 만난 문장들 보다 아이의 시간을 존중하게 만드는 문장이다. 거의 매일 아침 잠에서 덜 깨 30분 동안 10숟가락도 먹지 않는 아이에게 나는 주문처럼 말한다.
"아침 시간은 굉장히 중요한거야. 밥을 좀 빨리 먹고, 조금이라도 책 읽고 가는게 어떠니."
이 말에 아이는 늘 한숨을 쉬다. 천천히 아침을 먹으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떠올리고, 정리하고, 하물며 아무 생각없이 잠시 뇌를 비우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을 아이에게 기어코 그 시간들을 뚝뚝 끊어냈다. 할 일 많은 11살 아이의 영롱한 아침 시간이 혹시나 허송세월로 흘러갈까봐 그랬다. 사실 이건 아이에 대한 내 욕심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웠다. 상어가 움직이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 처럼 말이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조급한 엄마가 되었을까.
아이를 재우느라 밥하느라 청소하느라 나를 위해 쓸 수 없었던 그 시간들을 모두 허송세월로 여기며 아쉬워했다. 늘 조급했었다. 정작 시간이 생기면 카톡을 하거나 드라마를 보는게 고작이었던 시절에 왜 나는 내 시간을 육아와 집안일에 쓰는것에 인색했을까. 시험, 취업, 일. 젊은 날 내 삶에는 늘 목표가 있었다. 그런데 육아에서는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세운다 한 들 내 뜻대로 되지도 않거니와 이룬다 한들 (예를 들어 화장실 청소, 계절 지난 옷 정리 같은 것들) 금방 원상복귀 되어 어떤 목표이루었는지 조차 잊는다. 그렇다고 그 시간들이 의미 없게 흘러간 것일까.
김겨울 작가가 무대에서 치지도 않았을 곡을 360시간 연습했던 경험이 음악 DNA를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아이의 멍한 아침 시간은 내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아이의 창의 DNA 가 꽃피우고 있는 귀한 시간었을 수도 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씩씩대면서 집안일 하고, 아이를 먹이고, 재우던 그 시간은 20대에는 돈주고도 얻지 못했을 인내와 지혜 DNA를 새롭게 탑재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내일 아침엔 아이에게 꼭꼭 씹어 먹으라고, 급할 거 없다고, 여유롭다고. 사랑한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